[김은아의 도시스카프] 민낯이 건강해야 좋은 도시, 어두움의 미학 살려야

2024. 6. 1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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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라이프스케이프 크리에이터

본연의 아름다움 살릴때 디자인 가치 살아나 조명거리·빛축제 등 하늘 위 별 볼 일 없어져 다니자키 주니치로, 어둠·그림자의 변화 강조 시민에 불꽃·드론쇼 대신 밤하늘 볼 기회줘야

'호박에 줄 그으면 수박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유튜브 등 각종 소셜네트워크에서는 '호박이 수박이 되는 과정'을 짧고 강렬하게 보여준다. 화장품 회사의 마케팅 덕분이다. 최첨단 메이크업 기술과 초강력 커버력을 가진 화장품으로 인해 사람의 민낯을 보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는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민낯은 보기 어려워지고, 낯짝은 '두꺼워져만' 가는 세상이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가려진 모습만을 보고 있다. '속지말자 조명발! 다시보자 화장발!' 하지만, 속고 사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어릴 때부터 화장을 하면 피부 상한다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느냐", "화장 안 해도 그 얼굴로 미국도 가겠다"며 타박하시고 칭찬해 주시던 어른들 말씀을 실감한다. 꾸미지 않은 청춘들의 민낯은 정말 빛이 난다. 주근깨가 있든 잡티가 있든, 깐 달걀처럼 매끈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자체의 미(美)'다.

디자인의 미학은 외관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도 있지만, 오브제가 가진 진정한 아름다움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하는데 가치가 있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낮 축제만으로는 차별화가 안 되니 밤 축제도 한다. '빛 축제'가 그것이다. 평상시에는 볼 수 없는 레이저·드론 쇼, 불꽃 쇼는 관광객들의 마음도 설레게 하고 즐겁게 한다. 상점 등 관광지역은 반짝 매출을 올린다.

2000년대 초반에 시작해 인구 1만 명의 소도시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던 루미나리에(빛이나 조명) 거리가 낮에는 밤만큼 아름답지가 않다. 근래에는 각종 애니메이션이나 스토리 라인을 넣기도 하지만, 방문객들에게는 그저 볼만한 알록달록한 조명등에 지나지 않는다. 매우 화려하거나 이색적이면 포토 존으로 활용되고, 거기서 한 단계 더 진화하면 '인스타 성지'로 등극한다. 모두가 상업적 마케팅과 도시브랜딩의 산물이다.

대한민국 성인 2명 중 1명은 만성피로증후군에 시달린다. 해질 녘에 퇴근하기도 어렵지만 어두움이 내려앉은 밤에 퇴근해도 하늘 보기는 어렵다. 전철로 이동하니 LED 등이 달린 천장을 보고 살고, 집에 들어가는 길목조차도 현란한 빛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도록 한다.

문제는 삶이 버거운 현대인들이 '별 볼 일'이 없다는 것이다. 별을 볼 수가 없다. 빛 공해가 너무 심해 별도 달도 잘 보이지 않는다. 땅만 보고 피곤에 지친 사람들은 힐링을 위해 하늘을 쳐다보러 빛 축제에 간다. 아름답고 화려하다. 그 빛 뒤로 별과 달은 존재감이 없다. 그 하늘에 달과 별이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며칠간의 빛 축제, 불꽃 축제가 끝나고 나면, 다시 민낯이다. 민낯을 잘 가꾸고 자랑스러워하기보다 두터운 메이크업으로 민낯을 가릴 날을 기다린다.

다른 도시보다 더 차별화되고 강렬한 콘텐츠를 주문한다. 경쟁이 치열하다. 시민들도 일상의 것들을 잊어가고 잃어간다. 볼거리 제공자는 사용자의 니즈를 만들고 때로는 길들이기도 한다. 인공조미료와 간편식에 익숙해진 요즘 청소년들처럼 말이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들의 입맛은 처음부터 다양한 선택지를 보장받지 못했다. 천연의 재료로만 만든 음식은 맛이 없다. 아이들 입맛에 익숙하지 않아서다. 수천 수만 개의 조명을 달아 만든 조형물과 루미나리에는 순식간에 밤을 장악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고정한다. 하지만 끝나고 나면, 한바탕 꿈처럼 허망할 뿐이다.

1964년 노벨문학상 최종 후보자 6명 명단에 올랐던 다니자키 주니치로는 '어둠의 미학'에서 어두움이 갖는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강렬하고 획일적인 빛은 오히려 사물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감추어 버리지만, 어둠과 그림자, 미묘한 빛의 변화는 사물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고 했다.

세계적인 건축 명장 안도 다다오 역시 어두움의 미학을 자신의 건축에 적용한다. 나오시마 섬 지추박물관, 베네세 하우스 미술관, 그리고 이우환 미술관을 보면 빛과 어두움의 적절한 대비, 그리고 미묘하게 퍼지는 빛과 그림자를 적절히 활용하여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미를 신비하게 잘 살려냈다.

한 번이라도 필드 스코프나 현미경으로 달과 별을 관찰해보았다면, 인공적인 빛 장식물의 존재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칼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 점'에서 0.12화소에 불과한 아주 작은 점으로 찍힌 지구를 보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라고 말이다. 한 점 점으로도 충분히 소중하지만, 우리들이 살아가는 도시는 현란한 조명과 불빛들로 가득하다.

'착한 식당'에는 손님이 없다. 맛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건강 따위는 뒷전이다. 우선 맛이 있고 봐야 한다. 그래서 식당들은 조미료를 듬뿍듬뿍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빛 축제, 불꽃 쇼, 드론 쇼가 꼭 그런 형국이다.

도시의 시대에 살고 있고 도시 간의 경쟁도 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무엇으로 경쟁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 경쟁할 것인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도시의 주인은 시민이다. 누릴 사람도, 지켜갈 사람도, 그곳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시민이다. 잃어버린 미적 감각을 다시 찾고, 제대로 볼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미국 애리조나주 플래그스태프가 어떻게 밤하늘의 어두움을 지켜 달빛과 별빛을 시민들에게 돌려주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디자인의 미학은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찾게 하는 데 있다. 과한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채워야 한다.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두꺼운 낯짝'보다, 화장기 없이 건강하고 편안한 '생얼'이다. 민낯이 좋아야 진정한 미인이다. 도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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