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빈은 거대한 무도회장...왕궁에서 돌고 또 돌았다
땀이 흐르는 여름, 눈을 감아본다. 그때도 땀이 흐르고 있었다. 지난 2월 오스트리아 빈. 호프부르크 왕궁으로 향하는 차 안이었다. 한껏 차려입은 이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제서야 무도회 때문에 빈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춤을 춰야 한다. 춰 본 적 없는 춤을. 그것도 외국에서. 땀이 흐르고 식기를 반복할 때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밝은 조명이 호프부르크 왕궁을 비추고 있었다. 왕궁은 어둠이 깔린 도시에서 나 홀로 변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겨울의 빈은 ‘무도회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녁 시간이면 무도회에 참여하기 위해 한껏 차려 입은 이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매년 400여 개 무도회가 도시 곳곳에서 열린다. 올해 무도회 시즌(11월~3월)에는 56만여 명이 참석했다. 코로나 직전인 2019년(52만여 명)보다 늘었다. 여기에 도시 구석구석 춤 학원과 무도회 복장 대여점들이 자리하고 있어, 도시 전체가 무도회를 위해 숨쉬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무도회는 본래 귀족들의 행사였지만, 18세기부턴 참석 제한이 완화되며 대중적 행사로 자리잡았다.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요제프 2세(1741~1790)가 호프부르크 왕궁에 무도회를 개최한 것이 그 시작이다. 호프부르크 왕궁은 현재 대통령 집무실이 위치한 장소. 그러나 막상 도착하면 장소의 상징성과 전통 보다는 왕궁의 규모와 화려함에 압도된다. 레드 카펫을 따라 걸으며 자연스레 눈과 귀가 열렸다.
기자는 빈 커피하우스 오너들이 개최하는 무도회(kaffeesiederball vienna)에 갔다. 어떤 무도회를 가야할 지 모르겠다면, 주최 단체를 따져보는 것도 방법이다. 통상 같은 직업군끼리 모인 단체가 무도회를 주최한다. 커피하우스 오너들의 무도회는 격식 있는 프로그램으로 채워지고, 제과업 종사자들이 주최하는 무도회 각종 빵을 제공하는 식이다.
◊춤 못 춰도 괜찮아...필요한 건 복장
시작부터 강렬했다. 오후 9시, 스무살 남짓한 남녀가 손을 잡은 채 2층 중앙의 무도회장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수십 명? 아니, 100명 넘는 이들이 줄지어 있었다. 삽시간에 무도회장을 가득 채웠다. 검은색 턱시도와 흰색 드레스가 대비되며 무도회장에 있던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곧이어 빈 국립 발레단의 무대. 화려한 춤사위가 끝나고 관객의 돌아왔다. 왈츠 소리에 맞춰 하나 둘 무도회장 가운데로 모이기 시작했다.
몸치인데 무도회장에 갈 수 있을까. 빈 곳곳에는 무도회용 춤을 배울 수 있는 학원이 있다. 1시간 동안 기본 스텝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춤을 잘 추지 못하는 기자는 쉽게 따라할 수 없었다. 학원에서는 어느 정도 따라할 수 있던 것들도 실전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그저 리듬에 몸을 맡기고 시늉을 낼 뿐이었다.
이럴 때 이용할 수 있는 ‘택시 댄서’(taxi-dancer)가 있다. 주로 젊은 남성들인데, 무도회장에서 춤을 리드해 줄 상대가 필요한 여성에겐 좋은 선택지다. 돈을 지불하면, 호텔에서 무도회장까지 데려다 주기도 한다. 적게는 3명, 많게는 20명의 택시 댄서가 무도회에 대기하고 있다.
춤은 대충 넘어갈 수 있어도 절대 빠뜨려선 안 되는 게 있다. 복장이다. 여성은 바닥에 닿을 정도 길이의 드레스를, 남성은 검은색 턱시도에 하얀색 셔츠와 나비넥타이를 꼭 착용해야 한다. 빈 시내 곳곳에서 이런 복장을 대여할 수 있다. 통상 180유로(약 26만원)에서 300유로(약 44만원). 신발은 비용을 추가로 내야 하니, 별도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고상한 춤? 클럽 못지 않았다
왈츠에 몸을 맡겨 돌고 또 돌았다. 잘 추진 못했지만,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파트너와의 싸움(?)이었다. 다 같이 춤을 추는 속도와 방향만 맞춘다면 괜찮았다. 다만 춤을 추다 보면 휴식이 필요한 법. 지친 몸을 이끌고 2층 중앙에 위치한 무도회장을 벗어났다.
왈츠가 전부가 아니었다. 호프부르크 왕궁 전체가 여러 컨셉의 작은 무도회장으로 이뤄져 있었다. 어떤 곳들은 고상할 거라는 무도회에 대한 인상과 전혀 다르기도 했다. 디스코 주제의 방, 팝송이 흐르는 방, 밴드의 공연이 열리는 방. 어떤 방은 클럽을 연상시키는 듯한 리듬과 춤사위를 볼 수 있었다.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는 데 1시간이 걸렸다.
시간은 어느새 밤 12시 30분.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첫 번째 쿼드릴(quadrille) 차례. 본래 넷이 짝을 맺어 추는 춤이지만, 무도회에서는 모두가 짝을 맺어 추는 춤을 일컫는다. 수백명이 줄을 맞춰 서서, 지시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 뒤, 옆 사람과 자리를 바꾸거나 특정 줄이 한꺼번에 음악에 맞춰 음직이는 방식이었다. 늦은 밤 무도회장에 다시 한번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실제 빈에 거주하는 이들이 모두 무도회에 가는 것은 아니다. 현지 상인이나 주민들과 무도회에 대해 이야기하면, “언젠가 가보고 싶지만, 가보지 못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무엇보다 가격 때문이다. 기자가 방문한 무도회 기준, 입장료가 180유로(약 26만원)다. 26살 미만의 학생은 84유로(약 12만원). 여기에 무도회 참석에 꼭 필요한 복장을 빌리는 것까지 감안하면, 많게는 70만원이 필요하다.
현지 문화를 경험해보고 싶은 관광객에겐 무도회가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전통 문화가 과거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현재와 맞닿으며 변화해 왔다는 걸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통상 무도회 기간은 11월부터 3월까지다. 콘코르디아 무도회, 난민 무도회 등 여름 전후 열리는 무도회도 있다.
자정이 넘어가자 체력 싸움이었다. 마감 시간(새벽 4시 30분)까지 버틸 엄두는 나지 않았다. 두시쯤 무도회장을 떠났다.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야 다음을 꿈꾸게 된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로. 호프부르크 왕궁 밖은 여전히 컴컴했다. 잠시 꿈을 꾼 듯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우크라 매체 "러시아의 쿠르스크 탈환 공세 시작된 듯…10~15분 마다 공격"
- [기자수첩] ‘전공의 리더’ 박단, 이젠 전면에 나서라
- 부산·제주대 의대도 학생들 휴학계 승인
- “여·의·정 협의체 합의가 곧 정책… 성탄 선물 드릴 것”
- 젤렌스키 “우크라, 러·북한군 5만명과 교전중”
- [알립니다] 美 대선 이후 한미 관계 어떻게 설정해야 하나
- [알립니다] 제15회 민세상 수상자 정진석 교수·이미경 이사
- [팔면봉] 尹 대통령, 임기 반환점 맞아 “소득·교육 양극화 타개.” 외
- 딸이 돼버린 아들… 머스크 “워크가 내 아들 살해”
- “머스크는 수퍼 천재다” 트럼프가 인정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