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의 위기와 ‘당원 중심 정당’의 허실 [박찬수 칼럼]

박찬수 기자 2024. 6. 1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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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선 가치만큼이나 균형과 절제가 중요하다. 국민의힘은 1년6개월 전, 국민 여론 조사를 빼고 당원 100% 투표로 대표를 선출하기로 제도를 바꿨다. 명분은 “책임당원 숫자가 곧 100만명을 넘기에, 당원의 의견을 반영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시기가 됐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국민의힘 외연 확장에 도움이 되지 못했음은 총선 결과가 증명한다. 절제와 균형을 잃을 때, 예기치 못한 부작용에 맞닥뜨리는 건 한순간이다.
지난 5월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22대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 선출을 위한 더불어민주당 당선자 총회에서 우원식 후보가 예상을 뒤엎고 추미애 후보를 꺾었다. 이에 항의하는 당원 수만명이 탈당하자, 민주당은 국회의장 후보 선출에 권리당원 의사를 일부 반영하는 쪽으로 당헌·당규를 개정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박찬수 | 대기자

적어도 숫자로만 보면, 우리나라만큼 ‘정당 정치’가 긍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

요즘 서구 정치학계에서 많이 제기하는 ‘정당의 위기’의 주된 요인은 당원의 격감이다. 유럽 전통적인 정당들의 당원 수가 줄어드는 추세는 드라마틱하다. 1960년대 유럽 민주주의 국가에선 약 15%의 국민이 정당에 소속돼 있었지만, 1980년 그 비율은 10%로 줄었고 2008년엔 5%로 떨어졌다. 한때 국민의 10%를 차지했던 영국 노동당 당원 수는 2021년엔 국민의 2%인 20만명으로 줄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1990년까지만 해도 100만명 가까운 당원을 보유했지만, 2021년 당원 수는 41만명 수준으로 절반에도 미치질 못한다.

그에 비하면 한국 주요 정당의 당원 증가 추세는 놀라울 정도다. 1980~90년대에도 여야 주요 정당의 당원 수는 통계상으로는 100만명을 넘었다. 1987년 5공 정권 시절 집권당인 민정당의 공식 당원 수는 160만명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대다수가 당비를 전혀 내지 않고 오직 명부에만 올라 있는 ‘유령 당원’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보면, 2021년 기준 당적을 가진 이는 1042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20% 수준이다. 물론 허수가 많이 포함돼 있겠지만, 그래도 매달 1천원 이상 당비를 내는 진성 당원 숫자 역시 과거에 비해선 크게 늘었다. 3개월 또는 6개월 이상 당비를 내서 당직 및 공직 후보자 선출권을 가진 당원 수는 2022년 기준으로 민주당 72만명, 국민의힘 57만명이다. 2024년 민주당의 진성 당원은 100만명을 넘어섰다. 여야 모두 150년 전통을 가진 독일 사회민주당보다 훨씬 많은 당원을 보유한 것이다. 이런 변화엔 2000년 ‘당원 중심 정당’을 처음 내건 민주노동당의 출현과 2002년 대선에서 적은 액수의 후원금을 십시일반으로 냈던 노사모의 출현이 큰 역할을 했다.

선진국 가운데 한국만큼 정당 당원 수가 증가하는 나라를 찾기란 어렵다. 투표율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투표율은 지속적 하락세를 보이다가, 2007~8년을 기점으로 다시 상승 추세에 있다. 당원의 증가는 정치적 관심을 높이며 투표율 제고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정치 무관심과 정당의 위축으로 위기를 느낄 때 한국은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당원 중심의 대중정당’을 강조하는 건 당연하고,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당의 운영과 결정에 당원 참여를 더 많이 보장하는 게, 민주주의에 부합하고 당원 규모를 늘려 집권 가능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민주당이 국회의장단 후보나 원내대표 선출 때 권리당원 의사를 반영하고 당대표 사퇴시한에 예외 규정을 신설하는 내용을 담은 당헌·당규 개정안을 확정한 건 그런 사례다.

여기엔 함정이 있다. 한국의 정당은 이미 ‘당원 중심 정당’의 성격이 강해지고 있는데, 한두 사안을 이유로 가속도를 붙이는 게 부작용 없이 당내 민주주의 확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미국 정당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시도 중 하나였던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 도입은 그런 사례다. 당내 실력자와 대의원들이 전당대회를 좌우하는 걸 막기 위해 1971년 민주당의 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는 일반 당원과 지지자들이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하는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를 내놓았다. 이 시스템을 민주·공화당 모두 채택하면서 정당 민주주의는 한 단계 발전했다. 다만 차이는 있었다. 민주당은 1980년대 초에 한 걸음 후퇴해, 전체 선거인단 중 15~20%를 당 지도부가 지명하는 슈퍼 대의원으로 채워서 일반 투표자들이 경선을 100% 결정짓는 걸 제어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아무런 제동장치를 두지 않았고, 이것이 한 세대 뒤에 트럼프 같은 인물이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돼 미국 대통령에까지 오르는 치명적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정치에선 가치와 방향만큼이나 균형과 절제가 중요하다. 국민의힘은 1년6개월 전, 국민 여론 조사를 빼고 당원 100% 투표로 대표를 선출하기로 제도를 바꿨다. 명분은 “책임당원 숫자가 곧 100만명에 달하니까 당원의 의견을 반영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시기가 됐다”는 것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국민의힘 외연 확장에 도움이 되지 못했음은 총선 결과가 증명한다. 절제와 균형을 잃을 때, 예기치 못한 부작용에 맞닥뜨리는 건 한순간이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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