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국적 포기하고 23년째 '시니어운동' 하는 까닭은···

권구찬 선임기자 2024. 6. 19.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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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장
뉴욕서 '아메리칸 드림' 일군 뒤 귀국
무급에 사재넣고 선산팔아 '고군분투'
주택연금·연령차별금지법 도입 ‘보람’
은퇴정책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
대접받을 생각 말고 기여와 봉사를
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KARP) 회장이 서울 광진구 광장동 협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호재 기자
[서울경제]

주명룡(78) 대한은퇴자협회(KARP) 회장이 ‘인생 3막’의 길을 걷고 있다.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전 세계를 누비다 서른여섯(1981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 갖은 고생 끝에 ‘아메리칸드림’을 이뤘다. 2001년 쉰여섯에 한국으로 역이민을 와 미국은퇴자협회(AARP)를 모델로 한 지금의 KARP를 창설했다. 회원 수 4000만 명, 연간 예산 1조 원이 넘는 AARP는 전미총기협회(NRA),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와 더불어 미국 내 정치적 영향력이 큰 3대 단체로 꼽힌다.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자리한 KARP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협회 창설의 최대 목적은 은퇴자 재교육을 통해 경제 수명을 늘리는 데 있다”고 말했다. 2002년 설립된 KARP는 중장년층 권익 보호를 위한 ‘시니어 운동’을 주도하는 비영리 단체로 회원 수는 20만 명에 이른다. 그는 ‘한국형 은퇴 문화’를 만들기 위해 귀국 이후 23년째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로 고군분투 중이다.

“외환위기로 실직자가 넘쳐나고 준비 없는 은퇴에 가족까지 해체된다는 소식을 미국에서 들었습니다. 때마침 2000년 고령화사회(노인 인구 7% 이상)에 진입하자 한국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지요. AARP 회원으로 활동하며 1996년 미국 뉴욕에서 한인은퇴자협회를 결성한 경험이 KARP를 창설한 바탕이 됐습니다.”

그는 뉴욕 교민 사회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꼽힌다. 뉴욕 맨해튼에서 맥도날드 체인점을 세 개씩 운영할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 한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 3000여 개의 결집체인 한인식품업협회장과 뉴욕 한인 사회의 구심점인 뉴욕한인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내년부터 노인 인구가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합니다. 노인 인구 1000만 명 시대인 것이죠. 생산 인구가 줄어들고 부양 인구가 늘어나는 문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국가적 과제입니다. 이민자 수용과 외국인 근로자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정부 차원에서 은퇴·은퇴자 정책 마련을 고민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대한항공 승무원 시절 여객기 피격···호수 빙판에 비상착륙 ‘기적’

미국 이민에 앞서 그는 대한항공 국제선 승무원 시절 충격적인 경험을 하기도 했다. 1978년 4월 20일 파리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 KE902편이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에 피격돼 불시착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때 그는 피격 여객기 승무원이었다. 당시 소련 전투기가 쏜 미사일에 승객 2명이 사망했으나 여객기는 핀란드 접경 무르만스크의 얼어붙은 호수에 기적적으로 안착했다. 그는 “뒷날개 한쪽이 부서지고 기체에 수박만 한 구멍이 뚫린 채 얼음판에 무사히 착륙한 건 기적”이라면서 “두 번 태어났으니 의미 있는 일을 하라는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2024년 8월 개최하는 제2회 ‘세계시니어의 날’ 포스터(위). 아래 사진은 지난해 선포식 모습. /사진제공=KARP

그의 인생 3막 도전은 고군분투의 연속이었다. 정부 지원 없이 회비와 기부금만으로 운영되다 보니 협회 살림이 늘 쪼들린다. 그는 적지 않은 사재를 털어 넣은 것도 모자라 천안 선산까지 팔아 운영비를 조달했다. 귀국 이후 아예 미국 시민권까지 포기했다. 창립 때 마포에 300평 남짓한 사무실에 18명의 상근 직원까지 뒀지만 운영난에 지금의 광장동 상가 건물로 이사 오고 그마저도 4년 전부터 지하층만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무급으로 조직을 이끄는 그는 지난해 말 회원으로부터 ‘7만 시간 봉사’ 기념패를 받았다.

은퇴 후 15만 시간···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그래도 중장년층을 위한 제도 마련에 힘을 보탠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대표적인 게 주택연금제도와 연령차별금지법 도입이다. 주택연금은 2003년 재정경제부에 미국의 역모기지 제도 도입을 건의하는 제안서를 냈더니 주택금융공사가 미국 현지의 섭외를 부탁하면서 제도화에 급물살을 탔다. 연령차별금지법은 협회 창립 이듬해부터 줄기차게 국회와 당국에 건의한 정책 사안이기도 하다. 두 제도는 미국이 일찌감치 도입한 은퇴자 정책이다. 주 회장은 ‘대접 받으려 하기보다 봉사하라(Serve, not to be serverd)’는 AARP의 모토를 소개하면서 “나이가 많다고 해서 차별받지 않아야 하지만 반대로 유세할 것도 못 된다”며 “대접받을 생각 말고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하는 게 노인이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정년 이후 대략 15만 시간이 남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등의 시간을 빼면 13시간을 재량껏 쓸 수 있는데 30년 기준이면 14만~15만 시간쯤 됩니다. 지금의 5060세대는 과거의 세대와 달리 교육 수준이 높고 소비 여력도 있습니다. 이런 시니어 계층이 그냥 놀고먹고 15만 시간을 허송할 수 있겠습니까. 체계적이고 실용적인 은퇴 인력 재교육과 재직 근로자 퇴직 준비 교육이 필요합니다.”

협회는 여느 시니어 단체와 달리 국민 세금을 재원으로 한 시혜성 지원에는 반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배워서 벌고 오래 살자(배벌사)’가 협회의 모토다. 그래서 역대 정부가 기초연금 인상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선별 지급 전환을 주장해왔고 22대 총선 때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폐지론이 제기되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국민연금 개혁에 대해서도 “자식과 손자 세대의 부담만 늘어나는 것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라며 “세대 간 부담을 나눠서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소득대체율을 인상하지 말고 되레 연금 기득권층인 현 수급자도 일정 기간 급여를 동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1년 전부터 협회를 이끌 후임자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주 회장은 “이제는 자리를 잡았으니 뛰어난 능력자를 모셔 협회가 재도약할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 마지막 바람”이라고 말했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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