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하나 희생하지 않겠다 [이종건의 함께 먹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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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의 부엌은 항상 바쁘다.
희생이 당연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쫓겨난 이들을 위해 차려지는 밥상만큼은 무엇 하나 희생하지 않고 그렇게 차려진다.
그렇게 희생이 당연해진 무감각한 도시는 지속가능하지 않았다.
그런 이들 앞에 차려지는 비건 음식 한 그릇에는 무엇 하나 희생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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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건 |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그 집의 부엌은 항상 바쁘다. 낡은 화구에서는 늘 차가 끓고, 오븐은 바쁘게 빵이나 감자를 굽고 있다. 문밖의 작은 마당에서는 간장이며 된장, 고추장이 익는다. 두 명 정도 살법한 살림집 주방은 때마다 30인분의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주방 한편에는 낡은 봉투들이 버려지지 않고 각기 다른 몫을 하고 있다. 원래라면 고춧가루가 담겨 있을 제품 봉투에 땅콩이 담겨 있다든가, 마늘이 담겨 있던 봉투에 허브가 담겨 있다든가 하는 식이다.
이 주방에 들어간 것들은 하루아침에 버려지는 법이 없다. 그 쓸모를 충분히 다 할 때까지 주방에 머무르며 제 몫을 감당한다. 살뜰한 주방이다. 좁은 주방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주방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직접적인 노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그 목적을 위해 무언가 희생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든 모든 인위적 공간이 그렇지만 주방은 더 직접적이다. 동물성 식재료가 사용되는 것은 물론 일회용기 같은 쓰레기가 가장 많이 배출되는 공간. 나도 늘 밥을 해 먹는 사람이고, 가능한 한 조심하려 하지만 쌓이는 쓰레기를 줄이거나 재활용하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한 달에 한 번, 철거민들과 함께 하는 예배의 참석자들을 위한 수십 인분의 음식이 준비되는 주방의 풍경이다. 식사를 준비하는 이들은 ‘연대하는채식인모임’으로 스스로를 소개한다. 예배를 드렸던 엄숙한 거리가 한순간에 장터처럼 북적인다. 설 즈음에서는 떡만둣국, 무더위에 입맛 가실 때면 미역냉국과 주먹밥이 차려진다. 한식이 지루해질 때면 대륙 건너 파스타, 라자냐를 준비한다. 이번 달은 이마저 심심하다 느꼈는지 맛나게 볶은 쌀국수가 나왔다.
모든 음식은 ‘비건’이다. 그래서 이 집 주방에는 ‘살리는 노동’만 있다. 직관적이고 자극적인 맛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비건은 다소 멀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주방의 음식은 사뭇 다르다. 간장, 된장, 온갖 맛 내는 재료들을 다 직접 만들어 한 그릇 음식에도 맛이 켜켜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비건 음식 맛없다고 피하던 사람들도 그 깊이와 다양함에 놀라기 마련. 희생이 당연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쫓겨난 이들을 위해 차려지는 밥상만큼은 무엇 하나 희생하지 않고 그렇게 차려진다. 그 의미에, 맛에, 준비한 마음에, 간편한 한 그릇이 무겁다.
재개발·재건축으로 오래된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을 쫓아내며 이 도시를 지었다. 손님 맞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정직하게 노동한 작은 가게의 사장들을 쫓아내며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돈을 벌었다. 그렇게 희생이 당연해진 무감각한 도시는 지속가능하지 않았다. 오래됐지만 사랑받았던 골목은 황폐해졌고, 집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더니 전세사기 앞에 불안하기만 하다. 꾹 눌러둔 억울함이 한 되어 휘발되지 않고 도시 깊숙한 곳에 자리 잡는다. 그러다 터져 나온 목소리가 철거민들의 농성장이 된다.
그런 이들 앞에 차려지는 비건 음식 한 그릇에는 무엇 하나 희생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다. 아침에 씨앗을 심은 농부가, 오후의 수확을 기대하지 않듯. 긴 호흡으로 세상을 돌보는 이들의 식탁. 유난 떤다며 눈총을 주는 이들 앞에 묵묵히 나와 당신의 밥상이 더 평등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차려진다. 조금 덜 화려해도 괜찮으니, 이 도시와 세계가 지속가능하길 바란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이 ‘살리는 주방’을 닮길 바라며 볶음 쌀국수 한 그릇 맛있게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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