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와 홍길동이 만난다면…서울국제도서전 26일 개막
‘걸리버 여행기’에서 따온 ‘후이늠’ 주제
소인국(1부)과 대인국(2부) 여행이 잘 알려져 있지만,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 속 주인공 걸리버는 하늘 위에 떠 있는 나라 ‘라퓨타’(3부)와 말들이 사는 나라 ‘후이늠’(4부)도 여행했다. ‘후이늠’ 여행이야말로 이 소설의 알짬인데, 부정적인 것이 일체 없는 그곳은 거짓과 탐욕에 찌들어 구제 불가능한 우리 인간들의 나라를 풍자하고 성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중동 등에서 인간이 만든 전쟁과 폭력이 계속되는 지금, 우리는 과연 후이늠을 꿈꿀 수 있는가?
오는 26일 열리는 국내 최대의 책 축제 ‘2024 서울국제도서전’은 이 ‘후이늠’을 주제로 삼았다. 19일 오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주일우 서울국제도서전 대표는 “18세기 조너선 스위프트가 이성적인 생물들이 사는 나라를 통해 인간 사회의 해법을 고민한 데 착안해, 현재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 독자들과 고민을 나누고 싶었다”며 이 주제를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그동안 지구 위기 등을 도서전의 주된 주제로 삼아왔는데, 올해에는 당장 벌어지고 있는 전쟁 등 “재래식 비참함”도 여전히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하고 이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자 했다는 것이다. 26~30일 5일 동안 서울 삼성동 코엑스 3층에서 열리는 이번 도서전에는 총 19개국에서 452개의 참가사 등이 참여할 예정이다.
먼저 후이늠이란 주제와 관련해 도서전에서 기획한 두 권의 책이 눈에 띈다. 육당 최남선은 1909년 ‘걸리버 여행기’ 가운데 1·2부만을 묶어 ‘걸리버 유람기’란 제목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한 바 있다. 올해 도서전에서는 소설가 김연수가 최남선의 방식을 따라 지금·여기의 시각으로 3·4부를 ‘다시 써서’ 덧붙인 책 ‘걸리버 유람기’(그림 강혜숙)를 주제 도서로 선보인다. 이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김 작가는 “애초 이 작품에는 인간의 야만성과 당대 현실에 대한 깊은 절망과 비관이 담겼는데, ‘그런 와중에 300년이나 살아남았네’ 생각해보며 역설적인 희망 같은 게 생겼다. 책이란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긴 시간을 경험하게 해줌으로써 우리 자신이라는 협소한 공간을 좀 더 넓게 보여주는 구실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 작가가 다시 쓴 ‘걸리버 유람기’에는 후이늠에서 영국으로 되돌아가려는 걸리버가 이상사회 율도국을 만들고자 한 홍길동과 만나 ‘문학의 힘’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흥미로운 대목도 등장한다. 김연수·강혜숙 두 작가는 도서전 첫날 이 책의 의미와 작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시인 김혜순·박형준·안희연·정호승·진은영의 시 15편과 소설가 강화길·구병모·이승우·임솔아·장강명·천운영·편혜영의 단편소설 7편, 남서연·조윤서·하선우 작가의 일러스트 9점이 담긴 책 ‘후이늠: 검은 인화지에 남긴 흰 그림자’도 이번 도서전의 또다른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주제전시 ‘후이늠’에서는 세 가지 카테고리로 후이늠을 사유할 수 있는 400권의 책을 모아 선보인다. 큐레이터인 최진영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 센터장은 “도서전은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후이늠에서 돌아온 걸리버처럼 마굿간에서 살면서 괴로워할 수만은 없기에, 인간의 비참을 줄이고 미래의 행복을 사유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서울국제도서전은 여태껏 주로 특정 인물들을 ‘도서전의 얼굴’(홍보대사)로 삼아왔는데, 올해 공식 포스터에는 걸리버와 함께 돌고래가 등장한 것이 눈에 띈다. 수족관에 갇혀 있다 2013년 제주 바다에 방사된 남방큰돌고래 ‘제돌이’의 모습이다. 제돌이는 우리에게 동물과 자연도 법적 권리를 지닌 법인격이 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상징적인 존재 가운데 하나다. 29일에는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도서전에서 이에 대한 강연을 할 예정이다. 음식을 통해 한국인 엄마를 추억하는 에세이 ‘H마트에서 울다’의 작가이자 뮤지션 미셸 자우너(27일),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오만의 작가 조카 알하르티(29일), 분쟁 연구자 정환빈과 김민관 기자(27일) 등도 주제 강연 연사로 나선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주빈국으로, 한국과 수교 50년을 맞은 오만과 한국과 수교 65년을 맞은 노르웨이가 ‘스포트라이트 컨트리’로 도서전에 참여한다.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이 주관하는 서울국제도서전은 그동안 국고보조금 지원을 받아왔으나, 지난해 수익금 문제로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와 갈등을 빚은 일을 계기로 올해에는 기부금과 회비, 참가비 등 출협 자체 비용으로만 치러진다. 윤철호 출협 회장은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우려도 많았으나 지금까지는 참여도 높고 진행도 순조롭다. 이번에 도서전을 치르는 새로운 모습이 문화를 향유하고 창조하는 주체들이 정부 도움 없이도 자기 힘으로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문체부와의 갈등에 대해서는 “도서전 문제뿐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정부기관이 문화정책을 직접 하겠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민간과의 협치에 관심 없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며 정부를 비판했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에게 도서전 초정장을 보냈으나, ‘국외 일정 때문에 참가하기 어렵다’는 회신을 받은 상태라고도 했다.
올해 도서전의 경우, 전시장 공간 등 물리적인 규모는 줄지 않았으나 예산 부족으로 국외 출판사를 초청하는 ‘저작권 펠로우십’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없는 이유로 참가국 수 등은 예년보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주일우 대표는 “(출협에 주는 지원이 없는 대신) 문체부가 도서전에 참여하는 출판사나 에이전시에 예산을 집행해 비용을 보전해주고 있는 것으로 안다. 만약 향후에 (출협 쪽에) 정부 지원이 나온다면 그 자원을 출판산업 발전을 위해 어떻게 쓸 것인가 논의가 필요할 것이고, 나오지 않는다면 (나오지 않는 대로) 최대 책 축제를 잘 운영하도록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도서전 관련 자세한 정보는 누리집 sibf.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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