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다시 쓴 김연수…"절망 속에서 희망 봤죠"
도서전 26~30일 코엑스서 열려…19개국 452개사 참가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소설가 김연수는 올해 초 서울국제도서전 주일우 대표로부터 '걸리버 여행기'(1726)를 다시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이미 300년도 전에 나온 도서를 새로 써볼 이유를 찾지 못해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대화가 이어질수록 구미가 당겼다. '걸리버 여행기' 4부에 등장하는 '후이늠'에서 원작자 조너선 스위프트는 인간의 이기심을 신랄히 비판했는데, 이런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당대의 시각으로 새롭게 쓸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서다.
작업에 착수하고자 문헌을 뒤져보니 국내에서 최초로 '걸리버 여행기'를 번역·번안한 이는 육당 최남선(1890~1957)이었다. 그는 '걸리버 유람기'라는 제목으로 소인국과 대인국을 다룬 1부와 2부를 1909년 소개했다.
그의 번역 작업은 독특했다. 원작의 수도를 서울로, 훈련받는 곳을 '훈련원'으로 번역했다. 1726년 영국이 아니라 1909년 서울의 시각에서 번안한 것이다. 원작의 문어체적인 부분도 구수한 우리 '입말'로 현지화했다.
김연수는 그런 육당의 작업을 이어받았다. 그는 육당이 번역하지 않은 3부(라퓨타)와 4부(후아늠)를 오늘의 시각을 견지한 채 육당의 스타일을 헤치지 않는 범위에서 새롭게 썼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첫선을 보이는 2024년 판 '걸리버 유람기'가 탄생한 배경이다.
원작에선 걸리버가 일본 애도를 경유해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상선을 타고 귀환하는데, 그 상선이 지나가는 바다의 이름이 '한국해'(Sea of Corea)라 명기된 판본도 있다. 이곳은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활빈당 무리를 이끌고 떠났다는 남쪽의 섬, 율도국이 있는 곳이다. 김연수는 '걸리버와 홍길동이 만난다면?'이란 상상을 하게 됐고, 홍길동이 꿈꾼 이상사회가 '걸리버 여행기'의 마지막 부분을 새롭게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김연수는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 기자간담회에서 "걸리버 여행기는 지금 우리가 인간에게 절망하는 것보다 스위프트가 훨씬 더 깊이 절망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며 "그런데 이 사실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이 싹튼다. 오래전에 마땅히 멸망했을 인간 사회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고전이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시 쓸 때, 우리는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며 "그런 점에서 걸리버 유람기는 단순히 스위프트의 원전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보다는 2024년 한국의 시점에서 다시 쓴 것"이라고 덧붙였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현대판 고전을 소개하는 책 잔치 서울국제도서전이 오는 2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후이늠'을 주제로 개막해 30일까지 열린다.
해외에선 18개국 122개 출판사와 출판 관련 단체가, 국내에선 약 350개 출판사 등이 참여해 마켓 운영, 도서 전시, 강연, 사인회 등 450여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도서전 얼굴격인 주빈국은 사우디아라비아다. 2012년에도 주빈국이었는데, 12년 만에 다시 주빈국으로 참여한다. 오만과 노르웨이는 '스포트라이트 컨트리'로 조명한다. 주빈국 다음으로 주목받을 만한 국가를 소개하는 자리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2019)을 수상한 조카 알하르티를 비롯해 미셀 자우너, 데니스 뇌르마르크 등 유명 작가들이 도서전을 찾는다.
올해는 정부 지원없이 도서전이 열린다. 서울국제도서전 보조금을 두고, 정부 측과 출판협회의 대립이 이어지면서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단체인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문체부 감사 결과를 토대로 2018~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사업과 관련해 약 3억5천900만원을 반납하라고 출판협회에 최근 통보했고, 출판협회는 이에 반발해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장은 "회원들의 기부금과 회비, 참가사들이 낸 돈으로 도서전을 치른다"며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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