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국어'보다 '영어'에 더 정성인 사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 팬데믹으로 크게 추락했던 중·고등학생의 기초학력이 도무지 되살아나지 않고 있다. 교육부가 17일 공개한 '2023학년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에 따르면 그렇다. 실제로 국어·수학에서 '보통 학력'(3수준) 이상의 비율은 줄어들고 '기초학력 미달'(1수준)의 비율은 늘어난 2020년의 상황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다만 영어의 성취도에서는 작년에 비해 약간의 회복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 '이해관계'가 '친한 사이'?
학생들의 기초학력 저하가 가장 심각한 과목은 단연코 '수학'이다. 2023년 평가에서 수학을 포기한 '수포자'(1수준)의 비율이 중3에서는 2017년 6.9%의 2배에 가까운 13.0%나 된다. 고등학교 2학년에서는 국어(8.6%)·영어(8.7%)의 2배에 가까운 16.6%으로 치솟았다. 2017년 학업성취도 평가를 시작한 이후 가장 높은 비율이다. 수포자의 늪에 빠져버린 학생을 구해내기 위한 교육부와 학교 현장의 노력은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다.
국어의 기초학력 저하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2학년에서 보통 학력 이상의 비율은 수학(55.9%)보다 더 적은 52.1%에 지나지 않았다. 2017년의 76.2%에서 가파르게 줄어들었던 것이다. 국어의 추락 속도가 수학보다 더 가파르다. 이제 국어에서 보통 학력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학생이 2017년 4명 중 1명에서 작년에는 2명에서 1명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기초학력 미달의 비중도 2017년의 4.7%에서 8.6%로 껑충 뛰었다. 학생들의 국어 실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면서 학교 현장에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어려운 형편'이라는 볼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심지어 국어의 기초학력 저하는 문해력이 중요한 수학이나 탐구 과목의 기초학력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도 있다. 수능의 시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국어의 기초학력 저하는 학생들의 어휘력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두 집단의 이해관계를 따져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문제를 본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이해(利害)관계'를 '친한 사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더라는 보도가 있었다. '물이 차오르다'의 뜻을 몰라서 "물을 어떻게 발로 차올리느냐?"고 묻고 '조짐이 보인다'는 말에 "누굴 조져요? 욕 아닌가요?"라고 되묻는 학생도 있다고 한다.
우리말로 굳어진 한자어를 모르는 학생도 적지 않다. '사생대회'(寫生大會)를 '죽기 살기 대회'로 이해하고 '지향'(志向)하다'와 '식별(識別)하다'의 정확한 뜻을 모르는 고등학교 학생도 많다. 학생들에게 고택(古宅)·모의(謀議)·작당(作黨)·계략(計略)·음모(陰謀)와 같은 한자어는 낯선 외계어가 돼버렸고 비석이나 현판에 새겨진 한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상화'로 인식된다.
그나마 영어에서 회복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중학교 3학년의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작년의 8.8%에서 6.0%로 확실하게 줄었고 고등학교 2학년의 경우에도 작년의 9.3%에서 2020년 수준인 8.7%로 줄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보통 학력 이상의 비율도 작년보다 늘어났다. 영어 조기 교육 열풍과 스마트폰이 영어 기초학력 향상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유토리 교육철학으로 촉발된 학력저하
교육부는 기초학력 저하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2020년부터 3년 동안 계속된 코로나19 팬데믹을 꼽는다. 정상적인 등교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비효율적인 비대면 수업에 의존해야 했던 팬데믹 기간에 학생들의 기초학력이 심각하게 추락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기초학력의 저하는 이미 2010년대 중반부터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2021년 한국교육정치학회의 '교육정치학연구'에 실린 부산교대 이광현 교수의 분석이다.
사실 학생들의 학력 저하에 대한 우려는 5·31 교육개혁이 현장에 본격적으로 적용되었던 국민의 정부에서 시작되었다. '무엇이나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는 이해찬 당시 교육부 장관의 허무맹랑한 주장이 학교 현장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학생의 선택권을 보장해 준다는 신자유주의식 수요자 중심 교육철학도 공교육 붕괴를 가속하는 원인이었다.
그러나 제7차 교육과정이 본격적인 학력저하를 촉발하는 가장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여줌으로써 창의성을 길러준다는 일본의 '유토리'(餘裕) 교육철학을 기반으로 교육 내용의 30%를 무차별적으로 줄여버린 것이 문제였다.
엎친 데 덮친다고 학생의 선택권을 보장해 준다는 알량한 명분으로 시작된 제7차 교육과정의 '과목 쪼개기'도 문제였다. 국어를 화법·작문·독서·문법·문학·고전 등 8개 과목으로 쪼개고 수학을 확률과통계·미적분·기하와벡터 등 6개 과목으로 쪼갰다. 사회는 무려 11과목으로 쪼개졌다.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은 융합을 강조하는 사회적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해 버린 것이었다.
과목 쪼개기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2022년 교육과정에서는 물리·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의 심화 과목을 각각 2과목의 진로 선택으로 쪼개버렸다. 물리학II는 '역학과 에너지'와 '전자기와 빛', 화학II는 '물질과 에너지'와 '화학반응의 세계', 생명과학II는 '세포와 물질대사'와 '생물의 유전', 지구과학II는 '지구시스템과학'과 '행성우주과학'으로 나눠 놓았다.
학생보다 교사 양성기관의 이기주의를 챙기기 위해서 시작된 과목 쪼개기가 이제는 수능의 공정성에도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성격이 전혀 다른 선택과목의 성적을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표준변환점수'는 비현실적인 통계학의 논리를 극단적으로 왜곡한 억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현재 교육부가 심각한 문제로 지적하고 있는 '이과생의 문과 침공'도 사실 불합리한 표준변환점수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상위권 학생들이 확률과통계보다 미적분에서 더 유리한 표준변환점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문과 침공'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공교육의 붕괴와 학력 저하의 현실은 국제 사회에서도 화제였다. 결국 2007년에는 미국의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가 '적분기호도 모르는 공대'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고등학교에서 '미적분'의 기초를 전혀 배우지 않은 학생이 공대에 진학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분석한 기사였다.
정부가 학력 저하에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부가 작년 6월에 내놓았던 '공교육 경쟁력 제고 방안'이 기초학력 회복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책임교육학년' 지정이나 학업성취도 자율 평가 전수 실시는 잘못된 처방이다. 자율형 사립고를 비롯한 고교 유형 다양화도 이미 실패가 확인된 낡은 정책이다.
교육부가 내년부터 밀어붙이겠다고 호기를 부리고 있는 'AI 디지털교과서'를 통한 '수준별 맟춤형 교육'은 오히려 독(毒)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AI 디지털교과서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검증된 적이 없는 것이다. 혹시라도 교육부가 화려한 전자책(e-book)을 AI 디지털교과서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대규모 언어모형(LLM)을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생성형 AI는 학생들의 지식 교육을 맡길 수 있는 수준으로 완성된 것이 절대 아니다. 자칫하면 학생들을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환각'(hallucination)이나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디지털 속임수'에 섣부르게 노출될 수도 있다.
여전히 교육과정에 남아있는 '유토리 교육철학'의 잔재를 걷어내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학생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줄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쉽고 재미있는 것'만을 가르치면 학습 부담이 줄어든다는 기대는 착각일 뿐이다. 제대로 된 문장보다 그래픽과 사진이 넘쳐나는 어설픈 '과학' 교과서도 바로 잡아야 한다. 수명을 다해버린 수능도 개편해야 한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9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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