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더 캐치'의 주인공 윌리 메이스 별세

성진혁 기자 2024. 6. 19.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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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93세...이정후도 언급했던 샌프란시스코의 전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시카고 컵스의 경기가 열린 19일 리글리 필드 전광판에 윌리 메이스를 추모하는 이미지가 뜬 모습. /AFP 연합뉴스
메이스는 2015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로이터
1954년 월드시리즈 1차전을 빛냈던 윌리 메이스의 '더 캐치' 장면. / 조선일보DB

MLB(미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외야수인 윌리 메이스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그는 19일 캘리포니아주 팔로 알토의 요양원에서 심장 마비로 숨졌다. 아들인 마이클 메이스는 고인이 오래 몸담았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구단을 통해 “지난 몇 년 동안 아버지에게 보내준 사랑에 감사드린다. 여러분은 그에게 생명의 피 같은 존재였다”고 전했다.

메이스는 1948년 니그로 리그의 버밍햄 배런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1950년 샌프란시스코의 전신인 뉴욕 자이언츠와 계약한 뒤 이듬해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1973년까지 뛰었다. 한국전쟁 당시 군 복무를 하느라 뛰지 못했던 1952년 초부터 1953년을 제외하고 자이언츠에서 21시즌, 뉴욕 메츠에서 마지막 2시즌을 보냈다. 3005경기 통산 타율 0.301, 660홈런, 1909타점, 339도루를 기록했다. 내셔널리그에서 신인왕(1951년), MVP(최우수선수) 2회(1954·1965년), 골드 글러브 12회, 정규리그 홈런·도루 1위를 4회씩 기록했다. 1979년엔 명예의 전당에 들었다. 2015년엔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다. 이정후가 입단 기자회견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인 선수로 가장 먼저 메이스를 꼽은 바 있다.

메이스는 1954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현 가디언스)와 벌인 월드시리즈 1차전에선 ‘더 캐치(The Catch)’라고 불리는 환상적인 수비를 선보였다. 중견수로 출전했던 메이스는 2-2로 맞서던 8회 무사 1·2루 위기에서 상대 빅 워츠가 친 타구를 쫓아 담장 쪽으로 수십 미터를 달려간 뒤 공을 등진 상태에서 잡아냈다. 경기 장소였던 뉴욕의 폴로 그라운드는 홈 플레이트에서 왼쪽 펜스까지 85m, 오른쪽은 78m로 짧았던 반면 센터(146m)와 좌중간·우중간(136m)은 기형적으로 길었다. 메이스의 환상적인 수비로 자이언츠는 실점하지 않았고, 연장 10회말 3점을 뽑아 5대2로 이겼다. 자이언츠는 당시 4승 무패로 챔피언에 올랐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2017년에 월드시리즈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주는 상을 ‘윌리 메이스 월드시리즈 어워드’로 명명해 2018년부터 시상했다. 이 트로피는 나무 받침대 위에 메이스의 ‘더 캐치’ 모습을 담은 청동 조각이 붙어 있는 형태다. 메이스는 MLB 통산 최다 홈런의 주인공인 배리 본즈(762홈런)의 대부(代父)로도 유명했다.

MLB는 21일 메이스가 뛰었던 릭우드 필드(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특별한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 메이스를 비롯한 니그로 리그의 전설적 선수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경기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메이스는 건강 상태가 나빠져 헌정 경기 참석을 포기했고, 행사 이틀 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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