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밀양’과 ‘2024년 진주’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플랫]
2004년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한공주>에서 공주는 나직이 말한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피해자는 1년여 집단 강간 피해를 입고도 도망치듯 전학을 갔고 전학 간 학교에도 가해자들의 부모가 찾아와 다시 내몰렸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밀양 물을 흐렸다”며 피해자 탓을 했고 언론에 피해자 신상을 노출했다. 가해 고등학생 44명 중 제대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 잊을 만하면 일부 유튜버들은 피해자 의사와 상관없이 본인들이 심판하겠다며 ‘사적제재’에 나선다. 피해자가 설 곳은 여전히 그 어디에도, 없다.
유튜브 계정주들의 돈벌이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겠다. 끊임없이 불거지는 ‘사적제재 논란’은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겪은 처참한 결말이 현재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묻고 있다 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질문은 ‘2004년 밀양과 2024년 진주는 얼마나 달라졌는가’다.
📌[플랫]밀양 성폭력 당사자가 말했다, “피해자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지 않길”
📌[플랫]유튜버식 ‘정의 구현’… 피해자 동의 없이 ‘폭로’ 되고, ‘언론’은 기름 부었다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무기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이유로 피해자는 형사사법 체계에서 소외돼왔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 김진주씨는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는 빠져 있었다”는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2022년 5월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무차별 폭행당한 김씨는 1심에서 가해자가 살인미수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자 “12년 뒤, 저는 죽습니다”라는 글을 올려 공론화를 시작했다. 그는 사건 이후 사법 체계에서 소외된 피해자의 위치를 다시 쓰겠다고 결심했다. 가해자의 형식적 반성을 따지는 사법 시스템보다 피해자가 회복하기 위한 시스템이 왜 중요한지 설득하기 위해 가해자가 반성문을 낼 때마다 탄원서를 제출했다.
어렵게 그 호소는 통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탄원서를 봤다고 언급했다. 목격자 등장 이후 성범죄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공소장에 없는 죄명을 대상으로 추가 감정은 할 수 없다던 재판부는 “살인미수 양형기준에 중요한 동기를 찾기 위해서”라면서 “피해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싶다”는 피해자의 탄원서에 공감한다며 DNA 재감정을 허락했다. 결국 ‘살인미수 사건’은 ‘강간 살인미수 사건’이 됐고 가해자는 20년형을 받았다. 피해 사실을 알아내고 말겠다는 피해자의 뚝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김씨는 ‘국가의 2차 가해’라고 자신의 상황을 정의했다. “가해자는 반성하지도 않는데 판사는 반성하고 있다고 지레짐작했다. 피해자 의사는 묻지 않는 사법 체계는 회복적 사법이 아니었다.”
시인 박진성씨에게 ‘허위 미투 가해자’로 몰린 김현진씨도 자신이 ‘성희롱 피해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재판에 출석해 증언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2015년 박진성에게 성희롱을 당했습니다.” 그는 항상 이 문장으로 증언을 시작했다. 김씨는 “피해자가 문서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해 법원이 박씨의 유죄를 인정하면서 그는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는 구호를 현실로 만들어냈다. 김진주와 김현진은 ‘피해자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법 체계에서 ‘피해자가 여기 있다’는 것을 증명해낸 사람들이다. 그러나 모든 피해자가 이렇게 할 순 없다. 범죄 피해자들이 공판에 참여하는 건 피해를 다시 되새겨야 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운 일이다.
한두 사람의 용기보다 중요한 것은 매일매일 굴러가는 우리의 수사·재판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 아닐까. 이제 2024년 진주다. 지난해 11월 20대 남성 A씨는 편의점에서 일하던 20대 여성이 머리가 짧단 이유로 무차별 폭행을 했다. A씨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혐오범죄’라는 검찰 주장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심신미약’이라는 가해자 주장은 받아들였다. 이제 항소심이 다가온다. 피해자는 지난달 법원에 1심 재판기록을 열람하겠다 신청했지만 가해자가 재판부에 7차례나 제출했다는 반성문과 정신감정서는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말했다. “피해자가 읽을 수 없는 반성문으로 감형을 결정하는 것이 정의로운지, 재판부에만 구하는 용서가 옳은지 묻고 싶다.”
📌[플랫]‘편의점 숏컷 폭행’ 피해자 “피해자는 읽을 수 없는 반성문으로 감형, 옳은 일인가”
“저한테 죄송하다고 하지 말고 피해자한테 죄송하다고 하셔야죠.”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수사 검사는 계속 죄송하다는 가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어야 한다. ‘2004년 밀양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2024년 진주에서는 어떤 재판이 이뤄져야 하는가. 가해자는 누구에게 반성문을 써야 하는가. 어떤 법·제도가 피해자의 회복을 돕는가.’
▼ 임아영 젠더데스크 겸 플랫 팀장 layknt@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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