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블랙힐즈] 링컨 대통령 뒤통수에 숨은 '미국의 비밀'
지금 넷플릭스 등 OTT의 시대가 오기 전, '방구석 문화생활'을 책임져 주던 건 영화 케이블방송국들이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취향에 맞는 영화가 나오면 이미 봤던 것이라도 넋 놓고 보곤 했다. 그렇게 이른바 '틀어주면 일단 보는 영화'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쇼생크 탈출', '콘스탄틴', '쿵푸 허슬' 등이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또 하나를 꼽자면 '내셔널 트레져'가 있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을 맡은 영화로 미국 건국 초기 대통령들이 숨긴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을 수수께끼를 풀어가며 찾는 줄거리다. 영화에서는 다양한 미국 내 명소들이 소개되는데, 그중 하나가 블랙힐즈Black Hills National Forest다.
이곳은 미국 북서부 사우스다코타와 와이오밍에 걸쳐 있는 산림청에서 관리하는 보호구역이다. 블랙힐즈란 이름으로는 생소하겠지만 미국 역사상 존경받는 4명의 대통령 얼굴을 새겨놓은 마운틴 러시모어Mt. Rushmore 기념공원이 있는 곳이라 설명하면 바로 감을 잡을 수 있겠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이 얼굴 조각상을 보기 위해 블랙힐즈를 찾는다. 만일 이곳에 숨어 있는 다른 자연들을 알고 간다면 여행의 즐거움은 더 커질 것이다. 오늘은 블랙힐즈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돈이 아니라 고향을 달라
블랙힐즈의 면적은 120만 에이커가 넘는다. 남한 면적의 반 정도에 해당되는 크기다. 미국의 다른 곳이 다 그렇듯 이곳은 본래 원주민 '수우Sioux' 족의 땅이었다. 수우족은 케빈 코스트너가 출연한 영화 '늑대와 춤을'에 등장하는 부족이다.
평화롭게 살던 그들에게 불행이 온 것은 금 때문이다. 이곳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백인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수우족은 터전을 잃고 쫓겨 나가야만 했다. 1877년 미국 연방정부는 법을 만들어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을 몰아냈다. 무력으로 반발한 원주민들도 있었지만 희생됐다.
이로부터 100년 후 수우족은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대법원은 100년 전 수우족이 빼앗긴 재산의 가치를 1,700만 달러로 상정하고, 이자를 합쳐 총 13억 달러를 원주민들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고향이었다. 빼앗긴 토지를 돌려달라는 것이지 보상이나 배상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수우족의 후예들은 아직도 이 돈을 받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블랙힐즈 일대의 산과 토지를 돌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블랙힐즈의 동쪽 지형은 초원과 광야지대다. 이곳에는 배드랜즈국립공원Badlands National Park이 있다. 이곳에는 라코타Lakota족이 살았는데 그들은 이 땅을 '메이코 치카Maco Sica'라고 불렀다. 직역하면 이름 그대로 '나쁜 땅Badland' 또는 '침식된 땅Eroded Land'이라는 뜻이다. 'Badland' 라는 단어는 지질학에서 실제 사용되는 용어다. 지형이 풍화되고 침식되는 형상을 일컫는다고 한다. 이렇게 침식되는 지형들은 콜로라도, 유타, 애리조나 등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원주민들이 불렀던 이름과 학문적 용어가 적절히 들어맞아 배드랜즈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배드랜즈의 지형은 1년에 1인치 정도 깎여 나가고 있다고 한다. 높이가 계속 줄어들고 있으니 내일의 풍경은 오늘과는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50만 년 후에는 평평한 땅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곳은 원래 내륙의 바다였다. 이곳의 땅이 솟아오르고 화이트 리버White River와 샤이엔 리버Cheyenne River의 물줄기가 협곡을 만들어 냈다. 수백만 년 동안 자연이 만들어 낸 작품을 글로 표현하기는 한계가 있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경이로운 곳이다. 겹겹이 쌓인 지층들이 각기 다른 색을 표현하고 있다. 마치 잘 만든 샌드위치 같은 모양이다.
영화 '더 라이더The Rider(2017년)'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주인공이 고뇌하고 사색하는 장면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이다. 주인공은 두개골이 깨지고 발목이 으스러지는 부상을 당한다. 말을 타고 다시 로데오 경기에 나서고 싶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고 사고가 빚은 두려움은 극복되지 않는다. 그는 하반신이 마비되고 언어장애까지 겪고 있는 옛 동료로부터 힘을 얻어 재도전을 결심한다. 영화는 죽음에 이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말을 타는 위험을 안아야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손가락을 잃고 발목이 부러져도 다시 산을 찾는 산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유난히 악우 김창호와 임일진이 생각난다.
땅이 '흘러 내린다'
배드랜즈 하이킹을 즐기는 시간은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가 좋다. 한낮은 기온이 너무 높고 태양빛이 강하기 때문에 쉽게 탈수가 온다. 충분한 수분섭취는 필수다.
황무지 협곡으로 들어갈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방울뱀이다. 햇볕을 피해 그늘을 찾아 쉬고 있는 뱀들이 득실거린다. 파충류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물들이 살고 있다. 작은 검은발족제비Black Footed Ferret에서부터 덩치 큰 아메리칸 들소들이 서식한다. 들소들은 수십 마리가 무리지어 다니는 장관을 연출한다. 코요테는 작은 새와 다람쥐를 쫓는다. 푸마는 이 지역의 최고 포식자다. 엘크, 야생 당나귀, 흰꼬리 사슴 등도 보이고 가파른 절벽에는 큰 뿔 산양들이 살고 있다.
이곳의 바위는 단단하지 않고 쉽게 부서진다. 그래서 절벽타기의 달인인 산양들이 종종 바닥으로 떨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땅이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길을 잃고 부상당한 어린 산양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보행자들도 암반지대를 지날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해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수십 미터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필자도 말 안 듣고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아들 때문에 애먹은 기억이 있다. 절벽 밑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해도 굳이 내려가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아들은 이곳의 특이한 지형이 좋았는지 돌멩이 하나를 챙겨가기로 마음먹었었다. 나는 국립공원에 있는 어떤 것도 외부로 가져가면 안 된다고 했지만 놈은 고집을 부렸다. 아들은 공만 한 돌멩이를 주워들어 끙끙거리며 차로 옮기려고 했다. 마침 근처에 있던 파크레인저의 레이더에 걸렸다. 멀리서 땀 흘리고 가져왔으나 결국 된통 혼나고 돌멩이를 차 옆에 두고 떠나야 했다. 좋은 교육이 됐을 터다.
한편 블랙힐즈라는 명칭은 원주민 언어 파하사파Paha Sapa에서 왔다. 직역하면 검은 언덕Hills that are black이라는 뜻이다. 석양이 질 무렵 보이는 산정과 능선이 검은빛을 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을 다 돌아보려면 넉넉히 일주일 이상 여행할 계획을 갖고 와야 한다. 라피드 시티Rapid City에 숙소를 얻는다면 다니기 편할 것이다.
러시모어에 4명의 대통령이 새겨진 까닭
라피드 시티에서 30분 거리에 러시모어가 있다. 러시모어에 있는 검고 단단한 바위는 조각상을 만들기에 아주 좋은 암질을 갖고 있다. 자연은 이곳을 7,000만 년 동안 빚었고, 인간은 여기에 10여 년 동안 대통령 얼굴을 조각했다. 러시모어 대통령 조각상은 1927년 조각가 구즌 보글럼에 의해 시작되어 완공되기까지 14년이 걸렸다. 작품이 완공되기 전 아버지 보글럼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링컨 보글럼이 뒤를 이어 작품을 완성시켰다.
바위산에 조각품을 새기자고 구상한 사람은 이 지역 출신 역사학자 도안 로빈슨Doane Robinson이었다. 태양빛을 가장 많이 받는 동남향으로 솟은 지금의 바위를 고른 것도 이 사람이다.
사실 그가 조각하고자 했던 인물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는 미국 서부시대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최초로 미국 도보횡단 탐험을 했던 '루이스&클락', 그 탐험대의 가이드 '사카자위아', 라코타족 추장 '레드 클라우드', '버팔로 빌' 등이었다.
그러나 조각가 보글럼의 생각은 달랐다. 로빈슨이 생각한 인물들은 서부개척 역사를 상징할 수는 있지만 이는 오히려 지역색만 강조해 편협한 작품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미국을 상징하는 대통령들이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했고 정부 차원의 도움도 필요했다. 로빈슨의 부탁으로 지역 상원의원 피터 노벡이 나서 주었다. 노벡은 주지사 시절 커스터주립공원Custer State Park을 만든 정치인이다. 커스터공원은 미국 내 가장 넓은 주립공원 중 하나이며 아메리칸 들소 수천 마리가 살고 있다.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들소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영화 '늑대와 춤을'에 등장하는 들소들도 이곳의 들소들을 활용해 촬영한 것이다.
러시모어의 대통령 얼굴처럼 대형 조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실물을 축소한 샘플 제작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로빈슨은 7번에 걸쳐 샘플을 만들었다. 조각상의 디자인이 변경될 때마다 새로운 샘플을 제작했다. 샘플을 만들면서 작품의 크기와 비율 등을 맞춘다. 후원금을 모았으나 충분하지 못했다. 원래 구상은 인물들의 허리까지 조각하는 것이었으나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게 총 99만 달러로 작품이 완성되었다. 당시 화폐 가치를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큰돈이 들어간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로빈슨은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세계 여러 곳의 석상들을 연구했다고 한다. 동양의 부처 석상과 이집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면서 방향을 잡았다. 당시 최신 발명품 다이너마이트는 큰 도움이 되었다. 드릴에 전달되는 힘은 압축 공기를 이용했다. 암벽 밑에서 발전기를 돌려 압축된 공기를 만들었다. 압력 공기는 호스를 타고 암벽에 매달려 있는 석공들에게 전달되었다.
링컨 뒤통수 뒤에 숨겨진 장소
가장 먼저 조각된 건 워싱턴의 얼굴이다. 중앙에 위치하고 가장 많이 돌출된 바위가 워싱턴을 위한 것이었다. 워싱턴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제퍼슨 그리고 오른쪽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조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수정되었다. 제퍼슨을 조각하기로 된 왼쪽 바위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워싱턴 조각상의 크기를 보면 머리는 18m, 코 5m, 눈 3m 정도다. 만일 전신이 조각되었다면 그 크기는 140m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러시모어 대통령 조각상이 완성됐다. 정면에서 보면 왼쪽부터 조지 워싱턴(초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3대), 시어도어 루스벨트(26대), 에이브러햄 링컨(16대)이다. 각각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국부Founding의 워싱턴, 영토 확장Expansion 제퍼슨, 국립공원Preservation 시스템을 창안한 루스벨트, 그리고 분열될 뻔한 나라를 하나Unification로 만든 링컨이다.
러시모어는 국립공원에서 관리하는 국가 유적물이다. 조각상을 잘 보존하기 위한 정기 점검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진다. 암벽 등반 경험이 있는 보수 전문가들이 조각상의 얼굴을 살핀다. 바위에 틈이 생기면 물이 스며들 수 있기 때문에 빠른 대처가 필요하다. 바위에 붙어 있는 이끼와 곰팡이는 물을 고압으로 쏘아 벗겨낸다. 그대로 방치하면 바위는 부서진다.
일반 관광객들이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은 조각상 바로 밑이다. 조각상 위로 오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영화 '내셔널 트레져'에선 주인공들이 조각상 위로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더 나아가 통로를 이용해 조각상 안쪽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링컨 머리 뒤쪽으로 뚫려 있는 이 통로는 영화 속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 '비밀스런 공간Secret Room'으로 불리며 기록보관소Hall of Record라고 한다. 영화가 보여 주는 것처럼 실제로 이곳에 미국 역사에 관련된 비밀스런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일종의 타임캡슐처럼 아예 봉인돼 일반인의 방문과 관람이 불가능하다.
한편 링컨은 포드극장에서 총으로 암살당했다. 암살범의 총알이 뒤통수를 관통했다. 왜 하필 링컨 조각상 뒤통수에 비밀의 통로를 만들었을까? 숨어 있는 작가의 의도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수천 개 첨봉이 만들어 내는 비경
조각상이 만들어지게 후원한 상원의원 '노벡'의 이름이 붙은 산악도로Peter Norbeck Scenic Byway가 러시모어 산을 굽이돈다. 주변 풍경을 보면서 운전하면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도로 옆으로 바늘처럼 솟은 바위들을 볼 수 있다. 접근성이 편리하기 때문에 암벽등반을 즐기려는 등반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바위가 수천 개 있으니 하루에 한 곳만 오른다고 하더라도 다 올라 보려면 족히 몇 년은 걸릴 것이다.
이곳을 니들스 하이웨이Needles Highway라고도 부른다. 바위 중간에 구멍도 보이는데 이건 니들스 아이Needles Eye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명소다. 우리는 바늘구멍을 '바늘 귀'라고 하는데, 미국인들은 이게 눈으로 보이나보다.
블랙힐즈에는 크고 작은 호수가 여러 개 있다. 그중 실반 레이크Sylvan Lake가 가장 아름답다. 맑은 호수에 잘 생긴 바위들이 적절한 간격을 두고 서 있다. 조경 전문가가 인공적으로 만들었어도 이보다 아름답게 배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호수 옆 가장 큰 바위 정상에는 영화 '내셔널 트레져'에서 니콜라스 케이지가 바위틈에 손을 집어넣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 있다. 호수 안으로 연결되는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가 숨겨져 있었던 곳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배우의 이름을 따서 '케이지 록Cage up on the rocks'이라 부른다. 영화 때문에 명소가 되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바위틈에 손을 넣어본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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