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병률 “사랑은 부정확, 더듬거리며 불확실하게 발성할 수밖에”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4. 6. 19.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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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을 따라 사랑을 표현한 로맨틱한 그림들이 쭉 걸려 있었다.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들 역시 풍경화처럼 인상적이었다. 노부부도 그렇고, 혼자 온 어르신도, 가족들도 모두. 풍경과 사연을 주렁주렁 달고 온 듯 보인다.

관람객들만 그런 게 아니다. 직원 같기도 하고 봉사자 같기도 한 두 연인은 미술관 이곳저곳을 왔다갔다 관리하면서도 틈틈이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그림이 두 연인의 뒤를 쫓아가는 형국 같다. 사랑은 그렇게 명장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를 쓰기 위해서 여행을 자주 합니다. 시가 찾아올 상황을 만나기 위해서 혼자 많이 다니는 편인데요. 시한테 구걸하듯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기차도 타고, 그림도 보러 다니죠.”

그러니까 지난해 봄, 시를 만나기 위해서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 새벽시장에 들렀다가 오후에는 제법 큰 현대 갤러리를 찾았다. 멀리 한국에서 날아온 그는 말라 있었고, 뭐든지 흡수할 수 있는 상태였다. 이때 사랑하는 두 연인이 만들어낸 풍경이 그에게 스며들어왔고, 마침내 한 편의 시가 태어났다.

“미술관의 두 사람은 각자/ 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사람들에게 그림을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자신들은 서로를 깊게 바라보다/ 만지고 쓰다듬는 일로 바로 넘어갔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다// 두 사람을 그림 안으로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어떤 그림」 전문)

시인 이병률이 미술관에서 스스로 명장면이 된 두 연인의 사랑을 포착해 노래한 시 「어떤 그림」을 비롯해 최근 발표하거나 창작한 시 69편을 묶은 일곱 번째 신작 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문학과지성사)을 들고 돌아왔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이후 4년 만이고,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의 601번째 시집이다.

한없이 외롭고 쓸쓸한 그는 자신이 목도하고 상상한 사랑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춰 선다. 그리하여 푸른 외로움을 딛고 정확하진 않지만 다채로운 사랑의 순간들을 조각조각 모아서 밝고 환한 사랑의 세계를 보여준다.

‘길 위의 시인’ 이병률이 아릿한 문장과 지워지지 않는 허기로 채운, 막 당도한 사랑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여행 작가이자 출판사 대표이기도 한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이 시인을 지난달 23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어떤 그림」 속 두 연인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상상력이란 시인의 어떤 재산이고 재능일 텐데. 글쎄, 제가 그 장면에서 어떤 비극적 요소를 읽었다면 아름다운 그림으로 완성되지 않고 비관적이고 쓸쓸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것으로 봐) 아마 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표제시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은 사랑의 입구에 막 도착해, 더듬고 느끼고 돌입하는 순간을 노래한 작품이다. 사랑이란 결코 완성의 영역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을.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전문)

―이 시는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지난해 1월, 일본 홋카이도에서 혼자 기차를 타고가면서 기차 밖의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라는 한 문장이 문뜩 떠올랐다. 이 문장을 시집의 제목으로 하면 어떨까, 이 제목의 시를 쓴다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옛날 한 때 화려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고, 곧이어 사랑이 충만했던 그 사람도 떠올랐다. 기차에서 울어본 적, 이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계속해 무슨 때, 무슨 때가 켜켜이 쌓여갔다. 마지막은 무엇으로 할까. 사람은 항상 누군가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오거나 계속 같이 있고 싶을 때는 어딘가 밀월을 떠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곳에 가면 나와 사랑할 사람의 어떤 영원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라고 맺는 정도로 끝낸 것이다. 홋카이도에서 제법 많은 시를 썼다.”

―이광호 평론가는 어떤 장면에 막 도달한 순간을 포착한 ‘더듬거리는 말들의 세계’라고 표현했는데.

“사랑의 감정은 미묘한 감정으로, 선명하거나 정확하지 않다. 내가 사랑하고 그 사람과 사랑의 감정이 일치했는데도, 분열도 있고, 오해도 있고, 화학적으로 식어버리는 국면까지 도달하기도 한다. 심지어 사랑 안에는 이별도 있다. 하나로 얘기할 수 없으니까 더듬거리면서 말하고 불확실성으로 발성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시 「해변의 절벽」은 해안가 바위와 바다의 사랑을 노래한 절창이다. 절창인 이유는 해안으로 굴러온 바위의 수천 년 사랑과, 바위에 다다른 바다의 수만 년 사랑을 현실의 사건으로 포착하는데 넉넉히 성공했기 때문이다.

“해안 절벽 찰랑이는 물결에 목을 걸고 바위가 떠 있다/ 바위 표면은 살려고 납작 붙어 있는 따개비 같은 것들로 희끗하다/ 내 눈에다 깊이 그것을 담으려 하지만/ 자주 물처럼 흔들려 어렵다/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난 그만 울컥하였다// 왜 슬프냐고 당신이 물었다// 왜 슬프지 않느냐고 내가 물었다// 만 년 전에 해안이 밀려와 여기 도착하였고/ 천 년 전에 높은 산으로부터/ 이 바위가 조금씩 굴러와 여기 잠겨 있을 텐데/ 어떻게 슬프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다/ 당신에게 자갈 하나 주워 건네는 것으로 다였다”(「해변의 절벽」 전문)

―이 시에서 독자와 무엇을 나누고 싶었는가.

“개인적으로 섬을 좋아한다. 섬의 이미지는 분리된, 떨어져 있는 고독이다. 모든 섬들은 산이다. 모든 섬에는 산이 봉긋 솟아나 있는데, 섬을 떠올리면 봉긋한 산이 떠오른다. 어떤 여행이 끝인 것 같다. 누군가 처음 만나 좋아서 여행도 가고 섬을 함께 여행하고 있을 때, 옆에 있는 사람은 섬에 몰입해 있는 나의 상태를 이해해 줄까. 어떤 차오르는 생래적인 슬픔일 수도 있고 어떤 리듬에 의해서 촉촉해지는 감성이 됐을 때, 옆에 있는 사람은 과연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바닷가에 걸었을 때 바위가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따개비가 희끗희끗하게 있는 것들은 제주도가 떠올랐다. 우리의 고독과 고독은, 한 사람의 고독과 나의 고독은 연결될 수가 없어, 혹은 이런 대로 계속 사랑을 해볼까 하는 양면성을 모두 갖고 있다. 그대로 사랑을 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맞지 않는 사람으로 이 바닷가에서 헤어져야 하는 것인가. 두 국면이 다 있는데, 슬프기 때문에 모든 대상을 더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고, 저는 그런 것을 적는 사람인 것 같다.”

시 「장미 나무 그늘 아래」는 어떤 포옹의 순간을 포착한 노래한 작품이다. 그런데 껴안아주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남자는 오히려 여자의 품으로 가련히 파고들고.

“갑자기 여자가 남자를 껴안았다/ 남자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여자는 혼자 생각했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여자 품으로 남자가 파고들었다/ 남자는 곧 늦게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가만히 생각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장미 나무 그늘 아래」 전문)

―이 시는 포옹의 순간과 감정을 포착한 시인데.

“울음의 용도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감정을 좀 정화시키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크게 울 일도 없지만, 저에겐 기본적으로 슬픔이 내재돼 있고 슬픔이 저를 지켜준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남자는 왜 여성의 품에 안겨서 펑펑 울면 안 되는가, 하는 생각이 슬쩍 들면서 남자가 여성의 품에 안겨 펑펑 우는 상황을 생각해 봤다. 여성은 무슨 일이 있네, 라고 생각할 것이고, 남자도 스스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요즘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포옹이 아닌가 싶다)”

사랑의 시만 담긴 건 아니다. 세태를 꼬집는 듯한 시편도 있다. 그러니까 시 「줄」은 사랑의 시로도 읽힐 수 있지만, 부와 권력과 명예를 위해 파당을 만들고 줄을 서는 세태를 노래하는 우화 같은 작품으로도 읽힐 수 있겠다.

“사람들이 줄 서 있길래 서 있었다/ 어디를 향하는지 무엇 때문인지 몰랐지만 괜찮았다// 사람들이 몰려가길래 나도 따라갔다/ 뭐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따라가보는 거였다// 번번이 걸작 앞이 아니었고/ 거대한 계획을 앞세워서도 아니라는데/ 끼어들어서라도 줄을 섰다// 어떤 줄은 점점 다른 줄로 완성되어갔다// 그럴 수는 없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한 번 서면 돌아올 수 없는 줄이 되었다/ 결국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지만 혼자 서 있었다”(「줄」 전문)

―무엇을 노래한 것일까.

“왜 날 안 불러주지, 왜 나는 무명이지? 젊은 시절을 떠올려보면, 위험한 순간들을 잘 넘긴 것 같다. 누구한테 아부하거나 잘 보여서 줄을 선 게 아니라, 시를 쓴다고 혼자 살면서 잘 지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회는 비굴해지는 사람이 잘 살 수밖에 없도록 디자인이 돼 있고 끼워 맞춰서라도 살아가야 되는 무엇이 있지만, 그럼에도 줄을 서봤자 구리고 비굴해지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앞으로라도 혼자 조용히 시를 쓰면서 나를 지키며 살 수 있을까, 시를 경배하면서 살 수 있을까. 절대 무리를 지어서 행동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 같은 것이 있다. 옛날 선비 같은 독야청정, 단독자에 대한 약속처럼 도장을 찍듯 썼다. 변치 말자고.”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정체성을 담은 시편도 눈에 띈다. 시인은 시 「경력서」에서 시 쓰는 마음을 노래한다.

“생선 가지를 발라 움푹한 접시 주변에 기대 놓는다// 살이 발린 가시는 ‘시’라는 글자가 되어 침착하게 서 있다// 저 가시가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접시에 옮기다 흘리지 않고// 저렇게 시로 버티고 있는 것이 대견하다// 어느 날 나는 뭔가에 물렸던 것이다// 그 뭔가는 철저히 시였고// 시는 독을 흘리는 이빨인 채로 박혀// 지금까지 빠지지 않는 것이고// 이로써 내 경력은// 뭔가를 잡으려// 강물에 손을 깊이 놓고 있었던 것”(「경력서」 전문)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인지.

“생선 가시가 엇비슷하게 맞물려 있는 상태를 보고 시로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제가 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등단해 20년 넘게 시를 쓰고 있다. 시라는 것이 저기 있는데, 제 것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좋은 시를 쓰려고 시지푸스 같이 살아가고 있다. 시를 쓴다고 무거워져 있는 저를 짊어지고 밀고 나가야 되는 어떤 인생에 대해서 돌아보면, 나는 크게 잃은 것도 없고 크게 바라는 것도 없고 계속 시를 쓰려고 순간순간 집착하고 있다. 저의 이력의 다일 수도 있고, 경력의 다일 수도 있다. 저는 아직도 신인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쓰기 위해서 시라는 그물을 휘젓고 있다.”

―이번 시집은 무엇보다 사랑의 시편들이 눈에 띄는데.

“사랑의 시가 많이 들어간 것은 맞지만, 의도적으로 사랑의 시를 많이 쓴 것 같지도 않다. 이전 시집들에도 사랑의 시들은 20~30% 정도 꾸준히 포함돼 왔었다. (특별히, 2018년 작고한 허수경 시인이 생전에 사랑의 시를 써라고 주문했다고 했는데) 허 선배를 생전 독일에서 몇 번 뵈었다. 아마 두 번째 만났을 때였을 것이다. 제가 쓴 사랑의 시 몇 편을 쭉 읽으시면서 사랑의 시가 참 좋다, 야한 장면도 넣고, 일상에서 쓰지 않는 성적인 단어들도 과감하게 넣고, 사랑에 대한 너의 어떤 정서나 말하는 화법 같은 것들을 넣어서 사랑의 시를 한 권으로 묶으면 참 좋겠다고, 사랑의 시집으로 엮어보라고 권하셨다. 남사스럽고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라고 걱정했는데, 선배는 아니야 해, 넌 다 해, 라고 이야기해 주시더라. (그래도 이번 시집의 사랑 시들은 대체로 희망적으로 보인다) 이전에도 사랑의 시를 많이 썼는데, 주로 슬프거나 이루어지지 않는 비관적인 사랑을 많이 노래했던 것 같다. 가끔 낯선 독자들이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거나, 도대체 어떤 사랑을 했길래 이렇게 뼈를 깎는 시를 쓰느냐고 묻기도 하더라. 하지만 이번에는 희망을 암시하는 시편이 많다. 우리가 사랑했던 한때가 사람을 지탱해 주고 살아갈 힘을 주는 것처럼, 언젠가 사랑이 오면 잡아채고 뛰어들어야 한다. 환경 때문에, 처해진 법적인 무엇 때문에, 또는 나이 때문에 아름다운 감정 앞에서 검열하기 보다는 슬쩍 내맡기고 뛰어들어야 한다는 마음이 늘 있다.”

사랑에 대한 그의 예찬을 듣고 있던 순간, 경망스럽게도 소설가 김훈이 사랑이라는 말이 장악되지 않아서 작품에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한 오래된 인터뷰 장면이 불쑥 떠오르는 게 아닌가.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눈냄새를 맡았는데, 맡는 중이었음에도 눈의 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며 “시는 그런 것/ 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적었다. 아하!

“병률아, 너 기차 좋아해?” 교지 발간을 담당한 국어 선생이 어느 날 자신이 제출한 시를 들고서 물었다. 선생은 얼마 전 교지에 실을 시를 써오라고 했고, 그는 기차에 대한 시를 창작해 냈다. 중학생 이병률은 해맑게 대답했다. “제가 기차를 좋아해, 가끔 청량리역에 가서 기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 와요.”

그는 다섯 살 무렵 제천에서 가족과 함께 서울 청량리역 근처로 이사 온 뒤 자신의 것과 다른 친구들의 도시락 반찬을 비롯해 늘 어떤 불안이나 도시와의 충돌 같은 감정을 느꼈다. 물과 기름 같은, 어떤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듯한 생활은 그에게 남다른 어떤 감수성을 선물했다.

“너는 윤동주가 되겠구나.” 그의 시를 다 읽은 국어 교사는 툭, 말을 던졌다. 그러면서 윤동주 시인을 잘 안다고, 윤 시인은 기차를 좋아했다고 이야기를 들려줬다. 중학교 2학년 때, 교지 지도 교사였던 국어 교사와의 사담 시간의 기억이었다.

당시 교지 편집부는 3학년 형들이 리드했고, 국어 선생의 권유로 참여한 그는 선배를 도와서 원고를 모으고 교지 발간을 거들었다. 가족들은 삶이 바빠서 그의 삶에 깊이 들어오지 못했다. 아버지는 경동시장에서 작은 외할아버지가 하는 한약 건재상의 관리인으로 일했는데, 밤새 한약상을 지키고 돌아온 아버지에겐 늘 한약 냄새가 배어 있었고. 하지만 좋은 교사들과 선배들은 그에게 선한 관심을 쏟아주었다.

윤동주 시인이 누구지? 「자화상」을 비롯해 윤동주의 시를 찾아 읽었다. 정확히 잘 몰랐지만, 아름답고 어떤 물기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윤동주 같은 시인이 되면 좋겠구나. 아버지는 그림이나 음악을 싫어했지만, 시를 쓰는 것까지 말리진 않을 것 같았다. 중학교 2학년생 이병률은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이때부터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인생의 양식을 주는 롤 모델도 쫓았다. 시인 이병률의 원점이었다.

아버지가 입시원서를 사다주면서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보사에 일하면서 신나게 시를 썼고, 대학 졸업 뒤 5년 간 방송국에서 작가로 일해서 모은 돈으로 1993년 프랑스로 가서도 습작을 이어갔다.

1967년 제천에서 태어난 이병률은 1995년 시 「좋은 사람들」, 「그날엔」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등을 발표했고,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혼자가 혼자에게』 등을 펴냈다. 현대시학작품상, 발견문학상, 박재삼문학상을 수상했다. ‘시힘’ 동인. MBC 라디오 「이소라의 FM 음악도시」를 비롯해 오래 동안 라디오 작가로 일해 왔고, 현재는 문학동네 계열사의 달 출판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시 세계를 조금 설명해 준다면.

“처음 쉽게 껍질을 벗겨낼 수 없는 시를 추구했던 적도 있었다.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의 경우 상당히 힘을 줬다. 원고가 출판사마다 모두 반려돼 의식적으로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시집 『바람의 사생활』부터 스스로 조금 힘을 좀 빼고 썼던 것 같다. 이때부터 낭창낭창함의 힘을 알았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를 썼을 때 이것이 나다운 시색이겠구나, 라는 것을 확고히 느꼈다. 지금은 힘을 빼고 낭창낭창한 시를 좋아한다. 모든 시들이 독자들에게 이해된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냥 한 편 또는 몇 줄이 독자에게 어떤 생기를 준다면 좋겠다. 시를 읽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면, 제 시가 시든 한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시 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무엇인가.

“휴머니즘이고, 사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일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슬픔이나 외로움이 있고 잘 안 된 부분이 있는데, 이 부문을 간과하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넌지시 바라보면 통하는 어떤 지점이 있다. 시선이 작동하는 법은 혹시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가 아니라 기차를 타고 풍경을 보는 척하면서 넌지시 사람을 관찰하고 상상하면서 그의 아름다운 면을 포착하려 하고 꺼내려고 하는 것이다. 무작정 함부로 상상하는 것도 아니다. 이 사람도 어떤 스토리가 있을 것이고, 여기에 나의 한 장면과 합치면 어떤 서사가 생기기도 하고 시의 장면이 생기면서 하나의 시가 탄생한다. 그 부분이 시를 쓰게 하는 것 같고, 저는 그 부분을 잡아채는 것이다. 길에서 낯선 누군가가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줍는다 치면 제 입장에선 자세히 들여다볼 수도 없으니 그것이 뭔지는 몰라도 그것이 무엇이게끔 상상하면서 이 장면의 결론을 내린다. 옷핀이나 바늘일 수도 있고 씨앗일 수도 있고... 단어나 사물 하나를 가져오면서 시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악도 좋아한다. 우리 역시 어떤 악한 부분이 있을 텐데, 그 지점 역시 인간의 아름다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잘 나가는 여행 작가이자, 출판사 대표이기도 한데. 작가로서의 비전은.

“저는 시를 촉발시키는 어떤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 계속 떠나왔기 때문에 여행적인 에피소드나 사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울러 책을 만드는 사람을 동경했고, 에디터의 책상이 늘 궁금했다. 17, 8년 전 문학동네에 입사해 책 만드는 공부와 홍보하는 일을 했고, 기회가 닿아서 출판사를 운영하게 됐다. 저는 혼자인 저를 늘 지켜보려고 한다. 누가 무엇을 하자고 할 수도 있고 내가 무엇을 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의 귀결은 나는 혼자일 수 있을까, 그 안에서 철저히 혼자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다. 철저히 혼자일 수 있다면, 호기심을 다 쏟아서 그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혼자인 저를 계속 마주 보고 싶다. 이건 시를 계속 쓰겠다는 선언이다.(웃음)”

약속 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나타난 시인은 약간 피곤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짧은 상고머리에 반팔 라운드 티, 자신감 넘치고 경쾌한 모습에선 생활과 몸에 깃든 어떤 자유로운 영혼이 엿보였다. 그의 이야기는 친절하고, 흥미진진했으며, 자주 직유를 넘어서 은유로 내달리곤 했다. 은유의 대지에 닿기 위해 기자는 숨을 고르고 자주 사고의 걷기를 해야 했다.

아마 기자가 은유의 대지에 온전히 닿을 때쯤이면, 시인 이병률은 또다시 어딘가를 걷고 또 걷고 있을 것이다. 푸른 존재를 만나기 위해. 시를 만나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그는 여로에 서 있을 것이고, 걷는 동안 시인으로 온전히 살아갈 것이다. 혼자 덜컹거리는 밤기차를 타고 완도 옆 보길도에서 40여 년 전 처음 만났던 그날 아침의 마음으로. 바다와, 섬과, 숲과, 생명과, 사람들과, 그리고 시의 마음으로. 이 글을 읽으며 저기 앞에서 홀로 걷고 있는 당신도, 혹시 어떤 여로를⋯.

“무엇에 가까워지려 애쓰는 사람들 뒤로 한참 물러서려다가/ 발을 헛디뎌 느긋한 공기를 만난 그날 이후여야만 여행의 자격은 부여된다// 그래도 여행자로 살 것이라면 계속해서 잃어야만 한다/ 이길 것도 이길 일도 없는 길 위로 다시 나서서는 구질구질해도 된다//... 기분이 썩 나쁘지 않게 그리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인생을 지내기 위해/ 다시 길을 잃은 다음/ 돌아오지 않는다면 인생이 명백해질 것이다/ 이것 이외의 길은 없을 거라는 단호함으로”(「청춘에게」 부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이병률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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