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발라드·K-팝·‘팬텀싱어’까지…선 넘은 뮤지컬 ‘스타 캐스팅’

2024. 6. 19.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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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품에 같은 소속사 가수 4명
갈데까지 가고 있는 스타 캐스팅
“뮤지컬계의 팬덤 의존도 가속…
완성도 외면한 스타 캐스팅 만연”
쇼노트에서 제작한 ‘그레이트 코멧’엔 가수 케이윌을 필두로 K-팝 그룹 몬스타엑스 셔누, 우주소녀 유연정 박수빈 등 가수들이 대거 출연했다. [쇼노트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이돌 가수 피하려다 보니 이제서야 봤네요.”

국내 최대 온라인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엔 최근 막 내린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의 후기로 이 같은 글이 올라왔다. 예매자는 80일간 이어지는 일정에도 개막 두 달이 지나서야 공연을 관람했다며 이렇게 적었다. 원하는 출연진에 대한 선택은 ‘각자의 몫’이나 해당 예매자는 전문 뮤지컬 배우 캐스팅을 선호하는 입장이었다.

쇼노트에서 제작한 ‘그레이트 코멧’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중 일부 내용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이다. 두 번째 시즌을 맞은 뮤지컬의 캐스팅은 화려(?)했다. 인기 가수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첫 시즌에 출연했던 가수 케이윌을 필두로 K-팝 그룹 몬스타엑스 셔누, 우주소녀 유연정 박수빈 등이 캐스팅 됐다. 네 사람은 모두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소속이다.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인 스타쉽은 이 뮤지컬을 제작한 쇼노트의 지분 100%를 가진 모회사다.

뮤지컬계에 ‘스타 캐스팅’이 안착한지 10여년. 동방신기 출신의 톱스타 김준수가 ‘모차르트!’로 무대에 도전하며 뮤지컬 시장의 대중화가 시작됐으나, 긴 시간을 보낸 현재 ‘스타 캐스팅’은 업계의 달콤한 독약이 되고 있다.

트로트+뮤지컬, 아이돌+뮤지컬...'스타 캐스팅'으로 장르 결합

지금 뮤지컬 업계는 정통 뮤지컬 배우보다 타장르에서 진입한 배우들이 주조연으로 안착한 작품이 대다수다. 아이돌 그룹은 물론 발라드, 트로트 가수, 각종 경연 프로그램 출신 초심자까지 파고들고 있다.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는 “현재의 업계는 뮤지컬 배우만으론 티켓 파워를 확보할 수 없어 아이돌을 필두로 트로트 가수, ‘팬텀싱어’(JTBC) 출신까지 물밀듯이 들어와 여러 시장이 결합한 형태로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뮤지컬과 아이돌, 뮤지컬과 트로트, 뮤지컬과 ‘팬텀싱어’의 팬덤이 합친 시장이라는 설명이다.

한창 공연 중인 뮤지컬 ‘벤자민 버튼’(6월 30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엔 동방신기 심창민이 처음으로 뮤지컬에 도전했고, 코미디언 조혜련 신봉선은 뮤지컬 ‘메노포즈’(6월 13~8월 25일, 한전아트센터)에 캐스팅돼 관객과 만나기 시작했다. 개막을 앞둔 ‘하데스타운’엔 멜로망스 김민석이, ‘4월은 너의 거짓말’엔 트로트 가수 김희재, FT아일랜드 이홍기 이재진, 러블리즈 케이가 출연한다.

뮤지컬 ‘벤자민 버튼’에 출연 중인 동방신기 심창민.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스타 캐스팅’의 최대 장점은 장르의 대중화와 관객 확장이다. 동명 소설을 무대로 옮긴 서울예술단의 ‘천 개의 파랑’을 통해 K-팝 그룹 오마이걸의 효정이 첫 뮤지컬에 도전하자, 대포 카메라를 들고 오는 20대 남성팬들이 공연장으로 대거 유입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지난해 올라온 ‘모차르트!’ 역시 기존의 관객층과는 달랐다. TV조선의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 ‘미스터 트롯’ 출신의 김희재가 모차르트로 등장, 객석은 50대 이상 중장년 남녀 관객으로 꽉 채워졌다.

업계 관계자들은 “기존 뮤지컬 관객층이 20~30대 여성이 절대다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특이한 모습이었다”며 놀라워했다. 10년 전부터 뮤지컬에 출연 중인 슈퍼주니어 규현이 무대에 오르는 날엔 외국인 관객들도 숱하게 만나게 된다.

제작사 입장에선 ‘스타 캐스팅’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느 정도 팬덤을 확보한 K-팝 그룹 멤버들이 주인공으로 들어오면 티켓 파워는 물론 바이럴 홍보 효과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제작비 급증으로 인한 티켓 가격의 동반 상승, 이로 인해 ‘회전문 관객’으로 불리는 N차 관람객의 감소로 나날이 매출 압박에 시달리는 제작사에 ‘스타 캐스팅’은 쉽게 관객을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인 셈이다.

익명을 요청한 업계 관계자는 “소위 ‘팬질’을 해왔던 아이돌 팬덤의 경우 음반, 굿즈 구입은 기본이고, 뮤지컬 티켓보다 월등히 비싼 공연도 ‘올콘’(모든 콘서트 참석)을 달성하며 돈 쓰는 것에 익숙해졌다”며 “이에 반해 뮤지컬 티켓 가격은 15만원대 안팎이니, 기꺼이 몇 번씩 관람할 준비가 돼있는 관객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제작사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개막을 앞둔 뮤지컬 ‘4월은 너의 거짓말’엔 트로트 가수 김희재, FT아일랜드 이홍기 이재진, 러블리즈 케이가 출연한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교란 상태의 뮤지컬 시장…스타 캐스팅의 반작용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업계엔 ‘스타 캐스팅’으로 인한 부작용이 숱하게 노출되고 있다.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10년 전만 해도 스타 캐스팅의 긍정적 영향이 부각돼 도리어 그것을 활용해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며 “현재는 스타 마케팅이 뮤지컬계에 미친 작용과 반작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시장 확장을 위한 캐스팅이 뮤지컬 업계 스스로를 옥죄는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의 시장은 일종의 ‘교란’ 상태다. 너나 없이 뮤지컬 계에 뛰어들고, 누구라도 작품에 캐스팅하는 분위기까지 보인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상황을 “시장이 좋지 않다는 징조의 하나”라고 진단한다.

가장 큰 문제는 상업성에 기댄 캐스팅이다. 그 결과 의외의 인물들이 하나의 역할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지혜원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캐스팅을 할 때는 기본적으로 철저한 오디션을 통해 해당 캐릭터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봐야 한다”며 “하지만 스타 마케팅이 만연하고 있는 현재 철학 없는 캐스팅과 전혀 다른 이미지의 배우들이 같은 배역에 이름을 올리는 작품을 많이 보게 된다”고 꼬집었다.

스타 캐스팅의 경우 대다수 작품에선 ‘지정 오디션’을 본다. 업계에 따르면 지정 오디션은 이미 캐스팅을 결정한 뒤 상견례 차원에서 만나는 것을 말한다. ‘그레이트 코멧’의 주연 배우들 역시 지정 오디션으로 발탁했다. 쇼노트 측은 “무대 경험도 많고, 캐릭터를 잘 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한 배우들로 구성했다”고 말했다.

스타들이 독식하는 뮤지컬 시장의 폐해는 끊임없이 노출되고 있다. 관객들의 선택 역시 스타 위주로 쏠림 현상이 나타나고, 이로 인해 새로운 스타 발굴의 기회도 가로 막힌다. 배우들 사이에서도 임금불균형과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나타난다.

지혜원 교수는 “과거엔 공들인 오디션을 통해 발굴한 뮤지컬 배우들이 뛰어난 연기로 스타로 발돋움 하는 사례가 있었으나 지금은 스타들이 주인공 자리를 꿰차다 보니 새로운 스타가 나올 창구가 막혀버린다”고 했다.

결국 피해는 관객에게 돌아간다. 스타 캐스팅은 제작비와 티켓 가격의 동반 상승으로 이어지고, ‘선택의 폭’도 제한하게 된다. 뮤지컬 애호 관객은 뮤지컬 배우로, 아이돌이나 트로트 가수 팬덤은 해당 캐스팅으로 갈리게 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뮤지컬 시장의 팬덤화”라고 지적했다. 팬덤에 의존한 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작품성과는 무관한 콘텐츠가 많아진다는 점이다. 기준을 세우지 않은 스타 캐스팅의 결과다.

원종원 교수는 “지나치게 팬덤에 의존해 완성도조차 침해받는 작품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시장이 곪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결국 곪아 터질 때 새롭게 시장을 이끄는 실험과 시도가 나올 수 있는 만큼 현재는 뮤지컬계 정화를 위한 필연적 과정일 수 있다”며 “지금으로선 팬덤을 적절히 활용하며 예술적 가치와 문화적 체험의 깊이를 함께 추구하는 균형감각이 필요해보인다”고 강조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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