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더불어 나누는 사람

이정엽 국립부산국악원장 2024. 6. 1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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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엽 국립부산국악원장

담장 너머로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귀를 쫑긋 세우니 ‘놀~자!’ 하고 동네 친구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반나절 동안 등짝으로 마룻바닥에 광을 내고 있던 터라 신발을 구겨 신다가 냅다 집어 들고는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그리 불려 나가 골목부터 뒷동산까지 휘젓고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노을이 드리운 지붕 틈 사이로 올라오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마른나무 타는 냄새와 함께 허기를 자극한다. 해 질 녘까지 지겹도록 어울려 놀았는데도 헤어짐이 아쉬워 내일 또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다들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지금은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궁금한 코흘리개 시절의 동네 친구들이 무척이나 그립다.

놀이에 집중하던 나이를 지나 사춘기가 한창일 무렵.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을 처음으로 친구에게 털어놓고, 즐거움뿐만 아니라 고통과 괴로움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비밀 이야기를 공유하고 지켜내는 경험이야 어느 정도 있어 왔지만,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조차 힘든 일을 친구의 공감과 위로를 통해 절반씩 나눠 가졌던 그날은 청춘 일기의 첫 장이 되었다. 당시에도 나이에 비해 한참 성숙해 있던 그 친구는 이십 대 청년이 되었을 때 내게, “인디언 말로 ‘친구’는 ‘나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그러한 친구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아쉽게도 그 친구가 지금은 옆에 없다. 평생지기로 더불어 나누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나는 그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지 못했나 보다.

어떤 작가가 3000여 명을 대상으로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을 물었다. 복수의 답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장 소중하다고 꼽은 것들의 종류가 응답자의 수와 비슷했다는 것이 흥미롭지만, 역시 응답자 대다수가 친구를 가족 사랑 꿈 행복 등과 함께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으로 꼽았다. 앞서 열거한 소중한 것들에 집중하는 시기나 시점의 차이가 있을 뿐 나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일반적으로 친구를 정의할 때 더불어 나누기를 원하고 즐기며 서로에게 긍정적이고 지지하는 역할을 하는 관계를 말한다. 또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사상 등에 대한 공감대가 클수록 친구의 관계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소중한 친구를 잃은 경험이 있기에 이제는 새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에 더 노력하고, 일반적인 친구보다 좋은 친구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힘쓴다. 좋은 친구를 찾기보다는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마음속에 새겨 둔 세 단어가 있다. 믿음 공경 책선(責善).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존경 또는 공경할 수 있는 사람, 바른 일을 하도록 권하는 사람이 된다면 요즘 말로 ‘베프’나 ‘찐친’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단오를 앞두고 믿음과 공경 그리고 책선의 대상으로 삼은 소리 명창께서 귀한 선물을 보내주셨다. 설, 추석과 함께 3대 명절 중 하나인 단오는 한 해 중 양의 기운이 가장 왕성하고 더운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와 닿아 있어 예로부터 부채를 선물했다고 한다. 보내주신 부채에는 직접 붓글씨로 쓴 “창밖에 국화를 심고 국화 밑에 술을 빚어 노니 /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달이 돋네”라는 멋진 시조가 담겨 있었다. ‘해동가요’에 실린 시조로, 마지막 장은 “아희야 거문고 청 쳐라 밤새도록 놀아 보리라” 이며, 시조 전체가 남도 잡가 ‘흥타령’의 노랫말로도 쓰인다.


명창께서는 근래 산자락이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안은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집 앞 시냇물 소리가 청량한 너른 마당이 있는 집에서 큰 창문을 내어놓고,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와 더불어 국화와 달빛의 정취를 나누고 음악과 술로 마음을 나누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시조에 담겨 있는 것 같아 새삼 감동스러웠다. 그 마음에 화답하고자 지그시 눈을 감고 보내주신 부채로 부채질을 하니, 그 뜻이 청량한 부채 바람에 오롯이 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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