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재영]역대급 엔저에 ‘싸구려 국가’ 된 일본

김재영 논설위원 2024. 6. 18.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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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에선 하와이 문화를 체험하는 '하와이 물산전'이란 행사가 성황이다.

일본인들의 하와이 사랑은 원체 각별하지만 인기를 끄는 이유를 알고 보면 짠하다.

'싸구려 일본(야스이 닛폰)'이라는 자조가 나올 정도로 엔저가 장기화된 일본인들의 일상은 팍팍하다.

일본이 엔저를 용인한 건 2013년 금융 완화와 재정 확대, 성장 전략 등 '3개의 화살'을 쏘아 올린 '아베노믹스'로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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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논설위원

최근 일본에선 하와이 문화를 체험하는 ‘하와이 물산전’이란 행사가 성황이다. 일본인들의 하와이 사랑은 원체 각별하지만 인기를 끄는 이유를 알고 보면 짠하다. 이젠 하와이에 직접 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2019년까지 일본인의 해외 관광지 톱3 안에 빠지지 않던 하와이 호놀룰루는 올해 명단에선 사라졌다. 달러당 엔화값이 160엔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엔저(엔화 가치 하락)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싸구려 일본(야스이 닛폰)’이라는 자조가 나올 정도로 엔저가 장기화된 일본인들의 일상은 팍팍하다. 수입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학교 급식에서 미국산 쇠고기가 사라졌다. 1980년대에도 가던 해외 수학여행을 포기하는 학교가 늘었다. 지갑이 얇아진 사람들이 저렴한 상품만 찾으면서 ‘100엔 숍’의 매출은 지난해 처음으로 1조 엔을 돌파했다. 과거엔 일본인들이 해외를 누비며 “야스이, 야스이(싸다 싸)”를 외쳤지만, 이젠 반대로 일본으로 몰려든 외국인 관광객들이 “싸다 싸”를 연발한다.

엔화 구매력 감소에 가난해진 일본인들

일본이 엔저를 용인한 건 2013년 금융 완화와 재정 확대, 성장 전략 등 ‘3개의 화살’을 쏘아 올린 ‘아베노믹스’로부터 시작됐다. 엔화 약세는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주요 수단이었다. 하지만 투자 확대와 소득·소비 증가라는 선순환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긴 일본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수출 확대의 온기가 내수로 퍼지지 않았고 저성장은 장기화됐다. 오히려 수입가격 상승으로 서민과 중소기업이 타격을 받았고, 엔화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일본 국민이 가난해지는 결과만 낳았다.

장기 저성장은 익숙한 일본의 문화도 바꿔 놓았다. 선진국의 넉넉한 여유가 사라지면서 일본 특유의 ‘오모테나시(환대)’ 문화가 실종됐다. 값싸게 일본을 즐기러 온 해외 관광객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에 외국인에게 웃돈을 받는 ‘이중 가격제’가 확산하고 있다. 일본 제조업을 상징하는 ‘모노즈쿠리’(장인 정신)도 희미해졌다.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 자동차업계 전체에 만연한 인증 조작 스캔들은 일본 기업들에 적당주의가 스며들고 있다는 증거다.

‘좋은 엔저’를 표방하며 시작한 정책이 ‘나쁜 엔저’를 넘어 ‘슬픈 엔저’로까지 전락하게 된 것은 구조개혁을 통한 경제 체질 개선이라는 고리가 빠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수출기업들은 엔저로 손쉽게 실적을 올리면서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력을 외면했다. 글로벌 트렌드인 디지털 전환에 뒤졌고, 성장을 견인할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는 부족했다. 일본의 잠재성장률은 20년째 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구조개혁 없인 저성장 탈출 없다’는 교훈

한국도 일본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본이 엔저라는 마약에 취했다면 한국은 수출의 캐시카우 역할을 해준 중국의 달콤함에 취했다. 반도체의 물결에는 잘 올라탔지만, 인공지능(AI) 등 차세대 산업에선 뒤졌다. 올해 들어 반도체 수출이 반짝 호황을 보이자 그나마 지난해 바짝 긴장하던 위기감도 쑥 들어가 버렸다. 노동·연금·교육 개혁은 어느새 화두에서 사라졌고,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저출산은 이제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듯하다.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앞질렀다는 소식은 반갑지만 정작 핵심은 따로 있다. 통계 기준연도를 개편해 보니 이미 2014년에 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10년 동안 3만 달러 초중반의 덫에 걸려 있었단 얘기다. 장기 저성장의 위험을 보여주는 일본에서 교훈을 얻어 구조개혁의 돌파구를 열지 못한다면,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신세 한탄하는 다음 차례는 한국이 될지도 모른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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