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김기윤]“이집트 배달기사가 레바논에?”… 이스라엘 GPS교란에 중동 대혼란
수백km 떨어진 공항에 ‘현 위치’… 배달·택시·데이팅 앱까지 오류
이스라엘 작전 인정에 반감 폭등
민간항공기, 유조선도 위험 노출
《“현 위치는 레바논 베이루트 국제공항입니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북동쪽으로 200km 떨어진 포트사이드시. 지중해와 맞닿아 수에즈 운하가 시작하는 이곳에선 지난해 10월부터 황당한 일이 잦다. 휴대폰 위치정보가 엉뚱한 곳을 알려주는 오류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5일(현지 시간) 자동차로 두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이 도시 해변 인근에서 휴대폰 지도 애플리케이션(앱)을 켜고 ‘현 위치’ 버튼을 눌러봤다. 바다 건너 직선거리로 410km 떨어진 레바논 베이루트 국제공항에 있는 것으로 표시됐다. 한두 차례 휴대폰을 껐다 켜면 현 위치가 바로잡히기도 했지만, 또다시 다른 지역을 알려주는 일이 반복됐다.》
‘우버’ ‘볼트’ ‘인드라이브’ ‘카림’ 등 스마트폰 앱 기반 승차공유서비스를 사용해 일하는 기사들도 힘든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승객을 태울 정확한 위치 표시가 안 되는 데다, 승객이 요청한 도착지를 찾을 때도 애를 먹는다.
알렉산드리아와 포트사이드 등에서 일한다는 택시 기사 압드 씨는 “어쩔 수 없이 새 휴대폰을 하나 더 장만했다. 하나가 위치정보 오류가 생길 때 대비 차원”이라며 “요즘 나 같은 기사들이 많다”고 했다. 20년 넘게 포트사이드에서 택시 기사로 일한 호세인 씨도 “도시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GPS가 제대로 작동 안 하면 불안하다”고 했다.
현재 이런 불편을 겪는 나라는 이집트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국 대부분이다. 이스라엘과 교전 중인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은 물론이고 요르단과 시리아, 그리고 지중해 쪽 유럽연합(EU) 소속인 키프로스까지 GPS 혼란으로 고충을 호소하고 있다.
● 충돌 격화 때 혼란 최고조
현지인들은 특히 올 4월부터 GPS 혼란이 더 극심해졌다고 입을 모았다. 4월 1일 이스라엘군의 시리아 다마스쿠스 소재 이란영사관 공격으로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등이 숨진 뒤, 이란이 대대적인 보복 공격을 예고하자 GPS 교란 수위가 한층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은 4월 13일 실제로 이스라엘 영토에 미사일, 무인기(드론) 등 300여 대를 발사했는데, 이때도 이스라엘이 강력한 GPS 교란 작전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토드 험프리스 미국 텍사스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미 공영라디오 NPR 인터뷰에서 “데이터 분석 결과, 이스라엘군이 운영하는 한 공군기지가 중동 지역 GPS 교란의 출처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군도 이를 공식 인정했다. 다니엘 하가리 이스라엘군 대변인은 4월 5일 “군이 때때로 GPS 전파 방해 및 교란 작전을 벌이고 있다”며 “이스라엘 국민은 로켓 공격에 대한 경보를 알리는 휴대폰 앱에서 자신의 위치를 수동으로 설정하길 당부한다”고 했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헤즈볼라와 교전 중이던 이스라엘 북부 국경지대를 비롯해 일부 지역은 아예 GPS 신호를 차단하거나 비활성화시키기도 했다.
이스라엘 시민들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영국 BBC방송 등에 따르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지도 앱에서 반복적으로 자신의 위치가 이집트 카이로 국제공항으로 표시됐다고 한다. 이스라엘 내에서 사용하는 택시, 배달 앱 등도 운전 기사 및 승객의 위치가 레바논 베이루트 국제공항 등으로 표시되는 일이 잦았다.
이집트 포트사이드 내 한 리조트에 근무하는 직원 아티아 씨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충돌이 극심했던 4월엔 위치 표시는 물론 시간도 엉뚱하게 뜨곤 했다”고 전했다. 위성에서 위치를 찾아 그 지역 시간대가 설정되다 보니, 다른 국가로 표시될 경우 각종 전자기기에서 시간대마저 다르게 표시된 것이다.
통상 이집트와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등은 같은 시간대를 사용하지만, 당시 시간대를 한 시간씩 앞당기는 일광절약시간제(서머타임)는 시행 시점이 국가별로 달랐다. 이 때문에 서머타임을 몇 주 앞서 시행한 레바논으로 인식될 경우, 이집트 주민들의 휴대폰 시계가 갑자기 한 시간씩 앞당겨진 것이다.
● “유조선 충돌 등 대형 사고 유발 위험”
GPS를 활용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성을 추천하는 ‘틴더’나 ‘범블’ 같은 데이팅 앱도 촌극을 빚었다. 수백 km 떨어진 옆 나라 이성이 추천 대상으로 뜨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통상 데이팅 앱 서비스 이용자에겐 주변에 있는 상대방이 표시되는데, 카이로에 있는 남성들에게 최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있는 여성들이 대거 리스트에 떴다. 카이로에서 텔아비브는 400km가 넘는다.
올 5월 이집트인 A 씨는 데이팅 앱에 뜬 이스라엘 여성을 보고 “처음엔 이집트에 놀러 온 관광객인 줄 알았다”며 “연이어 이스라엘 여성들만 나와서 내 휴대폰이 해킹을 당한 줄 알고 놀랐다”고 전했다. 이집트 사용자들 사이에선 이스라엘 여성으로 위장한 스파이가 데이팅 앱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웃지 못할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런 GPS 혼란은 가뜩이나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높던 주변 중동 국가 국민들이 더욱 이스라엘을 비호감으로 여기는 계기가 됐다. 이집트 일간 알아흐람에 따르면 이집트에서 틴더 앱을 사용한 모스타파 씨는 “일부러라도 팔레스타인 지지를 드러내려고 데이팅 앱 프로필에 팔레스타인 국기를 추가했다”고 말했다.
GPS 교란은 지금도 여전하다. 16일 현재 기준 항공기 위치추척 사이트인 ‘플라이트레이더24’가 제공하는 GPS 교란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 주변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는 흑해 인근에서 여전히 가장 강한 GPS 교란이 발생하고 있다.
적국의 공격을 무력화하기 위한 방어 차원이라지만, 민간에는 단순 혼란이나 해프닝 수준 이상의 피해를 발생시킬 수 있다. 특히 전문가들은 GPS에 바탕을 두고 작동하는 항법 장치를 주로 쓰는 항공기나 대형 선박의 사고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잘못된 좌표를 토대로 운항하다가 예기치 않은 사고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 더타임스에 따르면 3월 그랜트 섑스 영 국방장관이 탑승했던 공군기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인근에서 GPS 교란 방해를 받아 조종사들이 30분 넘게 GPS 도움 없이 비행해야 했다고 한다. 핀란드 항공사인 핀에어 항공기 2대도 최근 에스토니아 타르투 국제공항으로 가던 중에 GPS 교란으로 항법 장치에 문제가 발생해 헬싱키로 회항한 사례가 있다.
해운전문매체 로이드 리스트 소속인 브리젯 디아쿤 데이터전문가는 NPR에 “선박자동식별시스템(AIS) 오류를 겪은 선박이 지중해 등에서 갈수록 늘고 있다”며 “만약 해로를 잘못 든 유조선이 암초 등에 충돌하면 대규모 기름 유출 같은 심각한 재해 수준의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GPS 전파 교란 |
합법적인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신호를 방해하거나 차단할 목적으로 허위 전파신호를 방출하는 것.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군,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군이 GPS 교란 작전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5월 연평도 주민도 북한의 GPS 전파 교란 공격을 받아 어선의 조업에 지장을 받았다. |
김기윤 카이로 특파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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