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임죄' 폐지하면 뻔히 벌어질 일들 [마켓톡톡]

한정연 기자 2024. 6. 1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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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정부 ‘재벌 승계’ 물타기 2편
배임죄 폐지론에 숨은 문제점
韓 상법엔 지배주주 신인의무 없어

논점을 흐리려는 시도를 흔히 물타기라고 표현한다. 미국에서는 진흙탕 만들기(Muddy the waters)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연못 물을 혼탁하게 만들면 물고기를 쉽게 잡을 수 있다는 혼수모어渾水摸魚라는 말이 있다. 갈수록 논점이 흐려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속세와 배임죄 논란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윤석열 정부의 '재벌 승계' 물타기 2편 배임죄 편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사진=뉴시스]

윤석열 정부의 '재벌 승계' 물타기 논란 1편 '소수만을 위한 잔치 : 누굴 위해 상속세 인하 카드 띄웠나'에서 알아봤듯 중산층의 상속세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공제 구간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논의하는 게 수순이다.

세율부터 절반으로 줄이자고 달려들면 논점이 흐려진다. 이는 조 단위 지분을 후대로 승계하는 재벌 총수 일가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자는 얘기나 마찬가지고, 우리나라 상속세의 목적과 거리가 멀다. 우리 대법원·헌법재판소는 1997년과 2022년에 "상속세의 법적 존재 이유는 부의 영원한 세습과 집중을 완화해 국민의 경제적 균등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판결문에 적시했다.

윤 정부에서 시끄러워진 건 상속세만이 아니다. 배임죄 폐지론도 상법 개정안의 논점을 흐리고 있다. 배임죄가 논란이 된 경로는 다음과 같다.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자는 밸류업 정책을 들고 나오자 그 핵심이 되는 재벌 대기업들의 지배구조에 관심이 높아졌다.

더불어민주당이 상법 개정안에 "기업의 이사가 회사만이 아닌 소액주주의 비례적 이익에도 충실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자 재계 이익단체들은 이사들이 소액주주에게도 충실의무를 지면 경영진을 향한 소송이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배임죄 폐지 발언은 이런 과정에서 나왔다. 이 원장은 지난 5월 19일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가 담긴 상법 개정안 도입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발언을 내놨다. 그런데 14일 이복현 원장이 배임죄 폐지를 주장했다는 보도와 이를 환영하는 더 많은 주장들이 한꺼번에 나왔다.

[자료 | 경제개혁연구소, 참고 | 2011~2021년]

실상은 어땠을까. 이 원장은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는 선진국에서 당연한 것"이라며 "자본거래 과정에서 일부 주주는 크게 이익을 볼 수 있지만 나머지 주주들은 손해를 볼 수 있음에도 현행 회사법은 이를 적절하게 조정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며 여전히 지지했다. 다만 "일도양단으로 말하면 배임죄 유지와 폐지 중 폐지가 낫다고 생각한다"며 "삼라만상을 다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배임죄는 현행 유지보다 폐지가 낫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배임·횡령죄가 사실상 재벌 총수 일가의 불법행위를 규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 원장이 말한 것처럼 '삼라만상을 다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어서'다. 우리나라 상법에는 지배주주를 직접 규제하는 조항이 없다. 미국 등 선진국들은 배임죄를 채택하지 않아도 그보다 더 무겁게 지배주주의 범죄를 처벌할 수 있다. 미국 회사법에 있는 지배주주의 신인의무(fiduciary duty)라는 개념 덕분이다.

지배주주의 신인의무는 대주주가 소액주주에게 가져야 할 선관주의의무善管注意義務(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와 충실의무를 명시한 것이다. 쉽게 말해, 미국에서 지배주주가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소액주주의 이익을 침해해 자기거래 등 부당한 사익을 추구하면 처벌받는다.

우리 상법에서도 계열사 사장에게 지시하는 그룹 총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긴 하다(업무집행지시자). 하지만 그들을 지배주주라고 명시하지 않는다. 총수가 계열 회사나 소액주주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조항도 없다.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신설을 반대하는 측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소액주주의 경영진을 향한 소송이 과도하게 증가하는 게 걱정이라면, 어떻게 제한할지를 고민해 상법에 포함하면 된다. 경영진의 소송 리스크를 이유로 배임죄 폐지를 먼저 주장하는 것은 논점을 흐리는 일이다. 지배주주의 신인의무도 없이 배임죄부터 폐지하면, 자칫 재벌 대기업집단 총수와 계열사 경영진에게 사법적 면죄부를 줄 수 있다.

경실련이 4일 주요 5대 재벌 계열사 및 업종 현황 발표 및 재벌 개혁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실제로 재벌 총수 일가는 2011~2021년 10년간 배임·횡령죄로 22명이 기소되고, 19명이 유죄를 받았다. 이승희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이 2021년 6월 공개한 '재벌 총수 일가와 전문경영인의 배임·횡령 등 범죄와 형사처벌·취업제한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유죄 판결을 받은 재벌 총수 일가 중 9명은 실형, 9명은 집행유예였다.

재벌 그룹 전문경영인은 배임·횡령죄로 10년간 42명이 기소되고, 3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승희 위원은 보고서에서 "총수 일가의 범죄가 전문경영인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며, 범죄에 가담하는 전문경영인을 처벌하고 규제하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ayhan0903@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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