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사 해봐서 아는데 [한겨레 프리즘]

노현웅 기자 2024. 6. 1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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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1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금감원에서 상법 개정 등 이슈와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현웅 | 정책금융팀장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시작된 밸류업 정책의 귀결이 결국 배임죄 폐지 논란까지 이어졌다.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의 이익’을 포함하자는 상법 개정 논의에 재계 반발이 이어지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긴급 브리핑을 자청해 배임죄 폐지론을 꺼내 들면서다.

재계의 주된 불만은 상법 제382조의3 이사의 충실의무 조항에 주주의 이익을 포함하면 관련 고발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에 터 잡고 있다. 상법이 개정되면 주주들의 경영 판단에 대한 사법적 심사 요구가 빗발칠 텐데, 배임죄 규정의 모호성이 맞물릴 경우 사법 리스크가 극대화될 수 있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배임죄 폐지까지 언급한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일이다. 형법상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이사)가 업무상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를 해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고 임무를 맡긴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성립하는 범죄다. 범죄 구성요건이 다소 모호한 것은 사실이지만, 판례는 실제 손해의 발생 여부에 따라 배임죄를 인정하는 원칙에 따라 법 해석의 범위를 좁혀놨다. “배신행위는 될지언정 실제 손해를 일으킨 배임 행위는 없었다”는 논리로 자리를 지킨 민희진 어도어 대표 사례에서 보듯, 배임에 대한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은 상당히 축소된 상황이다.

배임 시비에 경영 판단이 위축될 것이라는 주장도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는 총수 일가의 사적 이익을 위해 회사 전체 이익과 동떨어진 결정을 내리는 기업범죄를 자주 목격해왔다. 이에 김두얼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재직 시절 기업범죄 128건에 대한 수사와 해당 기업의 경영 실적의 상관관계를 실증 분석(‘경영범죄와 기업성과’ 보고서)했는데, 횡령·배임 등 수사가 이뤄진 뒤 기업의 경영 지표가 오히려 개선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배주주의 전횡이 유독 심각한 우리 기업문화를 고려하면, 기업범죄에 대한 정교한 수사야말로 밸류업의 적절한 수단일 수 있다는 진단이다.

경제인에게 유독 관대한 사면까지 더해지면, 이 원장의 주장은 더욱 설 자리를 잃게 된다. 2010년 한겨레는 2003년 이후 법무부가 밝힌 주요 특별사면 대상자 160여명이 유죄판결 뒤 얼마 만에 면죄부를 받았는지 전수 분석했다. 당시 경제인은 575일 만에, 정치인은 695일 만에, 고위공직자는 883일 만에 사면을 받은 것으로 분석됐다. 힘깨나 쓰는 이들 가운데서도 경제인들이 사면의 특혜를 가장 빨리 누린 셈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기울어진 디케의 저울은 여전하다. 경제 살리기를 명분으로 2023년 광복절 특사 대상에 오른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이 사면을 받고 불과 몇달 만에 또 다른 횡령·배임 등 혐의로 수사선상에 오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복현 원장은 자신이 누구보다 배임 수사를 많이 해봤기 때문에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실패 사례 분석을 통해 구조적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기소했던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이 무죄판결을 받은 점을 깊이 숙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건이 무죄판결을 받은 데는 회사 쪽 서버·피시 등에서 2270만여건의 디지털 자료를 압수하는 과정에 혐의와 관련한 자료를 제대로 선별하지 않은 절차 위법의 영향이 컸다. 주요 증거물의 증거능력이 부정돼 혐의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문제는 배임죄가 아니라 배임죄를 수사하는 검찰의 수사 관행이었다.

물론 현행 법체계에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형법과 상법,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등에 중복 규정돼 있는 배임 혐의를 정비하고, 형사처벌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개선 작업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기업 환경과 형사사법을 동시에 흔들 수 있는 법 개정 논의가 검찰 출신 차관급 공직자의 말 한마디로 시작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검사들의 ‘내가 수사 해봐서 아는데’로 경제까지 망가뜨릴 순 없지 않은가.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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