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당했다, 다들 날 멀리했다, 시 쓸 때만 난 살아있구나

한겨레 2024. 6. 18.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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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잡념잡상 _04
시인 강상기

시인은 오송회 사건으로 1년을 복역하고 출소한다. “제일 힘든 게 뭔지 아시요? 빨갱이 낙인이 찍힌 그날 이후, 사람들이 나를 멀리합디다. 나는 혼자, 살기위해 시를 썼어요. 오직 시를 쓰는 순간 아! 내가 살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잔솔밭에 타오르는 연기/ 억새며/ 가시덤불이며/ 저 모조리 타버리고 남은 잿바닥을 갈아/ 나는 새 씨앗을 뿌리러 왔다’

불에 델 듯이 강렬하다. 동학 접주의 격문 같고, 조태일의 ‘식칼’ 혹은 ‘시는 압제자의 가슴에 꽂는 창’이라 했던 김남주의 ‘창’ 같기도 하다. 불을 지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화전민이기는 하나, 이 시, ‘화전민’의 불길은 산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있다. 겉으로야 비탈을 개간하여 연명하는 화전민이라 하지만, 사실은 그 나라 백성으로 살기를 거부한 은자(隱者), 아니 세상을 불 질러 갈아버리려는 자욱한 혁명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렇게 쓰면 탈이 나는데, 탈이 나던데, 이 시를 쓴 때는 5·18이 나던 해, 1980년 가을이다. 시인은 뒷날 이로 인해 엄청난 ‘화상’(火傷)을 입게 된다.

시인 강상기, 1946년 전북임실 태생이다. 어려서 신석정의 시를 읽으며 자랐다. 고3 때 습작 10편의 시를 들고 신석정이 근무하던 전주상고를 찾아간다. 그가 자리를 비워 ‘나와/ 밤과/ 슬픈 별뿐이로다/…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 그의 ‘슬픈 구도’를 필사한 것, 그리고 습작을 좀 봐주십사 여쭈는 편지를 두고 왔다. 다시 찾아갔을 때, 시인은 학생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올백으로 넘긴 희끗한 머리, 파이프를 물고, 내가 꿈꾸던 시인의 모습 그대로였어요. 시누대가 심어진 한옥마루에 앉아 ‘애란아, 애란아, 술 좀 가져오너라’ 하십디다. 은주전자에 매실주를 마셨어요. 달짝지근한 첫 술 맛. 통 말이 없으셔서 내가 학생이 술 마셔도 되냐고 했더니, 시 쓸라면 술을 마셔야지, 하셔서 두 주전자를 비웠어요. 그리고는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의 소리를 그리워하네’, 딱 두 줄, 시가 이런 것이라고 장 콕토의 시를 얘기합디다. 술과 시를 그렇게 배웠어요.”

시인은 시를 써보라고 했다. ‘짧게 써라, 한자 쓰지 마라, 산만하게 쓰지 마라’고 했다. 학생은 그 말을 평생 자경(自警)으로 삼았다. “어린 내가 그날 시인이 돼버린 거요, 술이 불콰하여 집에 가는 길에 벌써 시인이 돼버린 거라. 그 봄날을 잊을 수가 없지.” 그날 이후 학생은 매일 한편의 시를 썼고, 좀 모아지면 그것을 들고 시인의 집으로 갔다. “선생님 생신이 1907년 음력 칠월칠석, 양력은 광복절입니다. 내가 키운 닭을 들고 인사드리러 갔더니, 백석시집 ‘사슴’을 건네주면서 읽어보라 해요. 몇 편 보다가 집에 가서 읽고 돌려드리겠다 했더니, “책은 여행을 싫어해”하면서 안 빌려주는 거요. 할 수 없이 나는 토방에 앉아 소리 내어 시를 읽고, 선생은 술잔을 들고 했지요. 백석이 당시 금서여서 뒤탈 날까봐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강상기는 전주교대 재학 중이던 1966년 잡지 ‘세대’에 시 ‘이천이백만헥터의 딸기밭’으로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이천이백만헥터는 남북한의 면적이고, 딸기밭은 딸기가 뭉개져 피범벅처럼 보이는 밭, 전쟁과 살육과 분단을 상징한다. 이어 1971년 동아일보에 시 ‘편력’이 당선됐다.

1981년 군산제일고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이듬해 4·19를 맞아 동료교사들과 학교 뒷산 소나무 아래 모였다. 4·19가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된 것을 한탄하고, 5·18희생자를 위한 묵념도 하면서 막걸리를 마셨다.

“전두환이가 말이야, 미국서 영어로 차를 시키는데 ‘아이 엠 커피’라고 했다는 거야. 전두환이 허벅지가 퍼렇게 멍들었는데 왜 그런지 알아? 이순자가 하도 기뻐서 ‘여보 이게 꿈이여, 생시여’하면서 쥐어뜯어 그렇게 됐다는 거라, 그런 우스갯소리들. 이 무서운 세상, 농민은 저곡가에 시달리는데 우리가 일상에 연연하여 우물쭈물 살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 아닌가, 그런 얘기들을 나누었어요.” 그리고 오장환 시집 ‘병든 서울’을 복사 한 것, 돌려 볼 책 몇 권을 나누고 헤어졌다. 이것이 5공의 대표적 공안조작사건 중의 하나인 ‘오송회’ 사건의 진실이다.

강상기는 그해 11월4일, 수업도중 군산경찰 정보과 형사에 의해 강제 연행된다. 한 제자가 시집사본을 버스에 놓고 내린 것이 화근이었다. 종점에 이르러 버스차장이 그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었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해방을 병상에서 맞은 오장환은 이 시를 쓴 이듬해 월북했다.

‘병든 서울’은 금서였다. 시에 나오는 ‘인민’이라는 말을 고리로 오송회는 엮인다. 인민은 불온이며, 용공이고 이적이니, 시집을 소장한 교사 5명은 보안법 위반, 즉 빨갱이가 된다. 소나무 아래 5명, 그래서 경찰의 작명이 ‘오송회’(五松會)다. “대공 분실로 옮겨지더니 눈자위에 칼자국이 있는 사람이 들어왔어요. 옷을 벗기고 물고문 전기고문, 몸을 철봉에 매다는 통닭구이 등 온갖 고문을 당했지요. 그래도 인정을 안 하니까 내 시 ‘화전민’을 들이대면서 이 간첩새끼 하고 두들겨 팹디다.”

오송회는 5명에 불고지죄를 더해 9명이다. 전원 구속된 오송회는 광주교도소에서 항소심을 기다리다 ‘남민전’을 만난다. ‘오송회’ 채규구 엄택수 이옥렬 강상기, ‘남민전’ 안재구 이수일 김남주 노재창 김영옥. 시인 강상기와 전사 김남주는 그렇게 조우한다.

“미결수라 그랬는지 남민전 사람들하고 옥살이를 같이했어요. 안재구 선생 주재로 매일 토론하고. 남주는 나와 동갑에 시인이라 친하게 지냈지요. 일본어판 ‘프랑스혁명사’를 읽으면서 어떤 대목을 소개해주기도 하고. 거기서 ‘진혼가’, 칫솔대를 갈아 우유팩에 눌러 첫 시집을 썼다는데 같이 지내면서도 감쪽같이 몰랐어요.” 강상기는 훗날 투병중인 김남주를 위해 시 ‘한 나무에 핀 꽃, 남주에게’를 쓴다.

오송회 사건은 1983년 대법원에서 고등법원 형량 징역 7~1년, 그대로 확정됐다. 시인은 1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뒤 ‘…응답하라/ 나에게 국가는 무엇인가를/ 대낮도 캄캄한 저녁이어서/ 분노가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고 시 ‘1인 시위’를 썼다. 사법부가 권력의 장단에 춤을 추던 당시, ‘공산주의 찬양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전원 법정구속에 전원 실형을 때린 뒤 승승장구한 광주고법 재판장은 이재화이다. 이 사건은 2008년 재심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는다. 재심재판장은 “처절한 고통을 받았던 점에 대하여 깊은 사과”의 말을 짤막하게 전했다. 소나무 아래 모인지 26년만의 일이었다.

저녁에, 그의 단골 해장국집에서 시인을 만났다. 지팡이 두 개를 짚고 들어온 그의 걸음걸이는 휘청휘청 위태로웠다. 눈빛은 총총하되 50㎏이 안된 몸은 허깨비처럼 말랐다. 나는 소주를, 그는 가져온 허브차를 마셨다. 고문과 해직과 이혼(뒤에 재결합), 막노동판을 거쳐 학원 강사로 살아온 그 모진 세월이 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제일 힘든 게 뭔지 아시요? 빨갱이 낙인이 찍힌 그날 이후, 사람들이 나를 멀리합디다. 나는 혼자, 살기위해 시를 썼어요. 오직 시를 쓰는 순간 아! 내가 살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첫 시집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 이후 ‘민박촌’ ‘와와 쏴쏴’ ‘콩의 변증법’ 등 시집과 산문집 10여권을 펴냈다.

그의 근작 ‘조국연가’의 전문이다. 이 세상에 불을 지르는 ‘화전민’에서, 대낮도 캄캄한 ‘1인 시위’의 분노를 넘어, 다시 새 씨앗을 뿌리지 않을 수 없는 ‘조국연가’에 이르러, 샛별과 달빛과 햇빛 같은 시어들이 등장한다.

‘강물에 달빛이 고기비늘처럼 하얗게 빛날 때면/ 벗이여, 나는 조국의 숭고한 정신을 꿈꾸었다/ 바다에 비친 햇빛이 너울너울 출렁일 때면/ 벗이여, 나는 조국의 뛰는 심장을 생각했다/ 유리창 칸칸이 불을 켜고 달리는 야간열차를 볼 때면/ 벗이여, 나는 조국의 아련한 모습을 보았다/ 고요한 숲 속 소쩍새 울음이 어둠만큼 깊어질 때면/ 벗이여, 나는 갈라진 조국의 아픔에 귀 기울였다/ 해 저물어 어둠 와 맨 처음 샛별이 나타날 때면/ 벗이여, 나는 하나 된 조국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노을 물든 하늘에 노란 은행잎 아슬아슬 나부낄 때면/ 벗이여, 나는 조국의 이름을 내 심장에 새겼다’

이광이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나는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는 소질이 없어 못 쓰고 그 언저리에서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머리가 많이 비어 호가 ‘반승’(半僧)이다.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와 책 ‘절절시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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