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소통하는 과학’에 평생 헌신 ‘꼿꼿 과학학자’
한국과학사학회 간사 12년 맡고
과학저술인협회 창립에 큰 역할
과학사·과학철학 학문 토대 일궈
검소하게 살며 여러 학회에 기부
젊은 학자를 위한 상 만들기도
신군부 비판 서명 참여로 해직
운전 안 하고 평생 핸드폰 안 써
송상용(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선생님이 지난 6일 돌아가셨다. 향년 86. 언제까지 후학들과 함께 웃으시고 우리 불평을 들어주실 것 같았는데,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메일을 열어보면, 여행지에서 소식을 전하실 때도 있고, ‘냉면이나 같이 하지’ 하시면서 연락을 돌리실 때도 있었다. 나도 가끔 선생님께 식사 한번 하자고 연락을 드리기도 했지만, 선생님 연락을 받고 나간 적이 열 배는 더 많은 거 같다.
송상용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대학생 시절 배리 카머너가 쓴 ‘원은 닫혀야 한다’, 버트란드 러셀이 쓴 ‘과학과 종교’의 역자로 처음 알게 됐다. 둘 다 선생님이 깊이 관여하신 전파과학사의 ‘현대과학신서’에서 나온 책이었다. 그리고 1983년에 과학사라는 학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뒤에 선생님의 저서 ‘과학사 중심 교양과학’을 띄엄띄엄 읽었다.
그러다 1983년이 끝나가는 겨울, 동학들과 서울 쌍문동 선생님 댁을 방문해 처음 뵈었다. 그때 꽤 긴장했다. 날씨가 추운 탓도 있었겠지만, 책으로만 뵙고, 소문으로만 듣던 선생님을 처음 뵙는 자리여서 더 그랬다. 나를 소개했는데, 선생님 반응이 뜻밖이었다.
“자네가 홍성욱인가, 쓴 글을 내가 아주 잘 읽었지.” “예?.. 혹시 무슨 글을 말씀하시는지요?” “그 ‘피지카’에 특집으로 쓴 글 말이야. 현대과학과 인간 소외에 대한 글.” “...” “그런데 왜 이제야 왔나?”
나는 그 무렵 물리학에서 과학사로 전공을 바꾸고, 막막하던 미래가 아예 캄캄해져서 혼자서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그런데 말로만 듣던 송 선생님이 나를 알고 계시다니, 내 글을 읽으셨다니, 그리고 왜 이제야 당신을 찾았냐고 하시다니! 그날 혼자 집에 가기 힘들 정도로 대취했다. 그리고 어려운 공부를 할 힘을 낼 수 있었다.
선생님은 고군분투하셨던 것 같다. 서울대 문리대에서 화학과 철학을 전공하시고 인디애나 대학에서 과학사로 석사 학위를 받으신 뒤 귀국하셨다. 예전에 왜 미국에서 과학사 박사과정을 계속하지 않으셨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빨리 귀국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언제는 선생님이 시간 강사를 하시면서 가르친 제자들이 만 명이 넘는다는 얘길 하신 적도 있다. 그때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의 이름을 꽤 많이 기억하고 계셨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선생님은 한국과학사학회의 창립회원이셨고, 12년 이상 간사를 하셨고 부회장과 회장을 지내셨다. 지금은 낯설지만, 과학저술인협회 창립에도 큰 역할을 하셨고, 회장도 역임하셨다. 오랫동안 과학철학의 중요성도 설파하시다가 과학철학회 활동도 하시면서 회장을 지내셨다. 일찍이 생명윤리나 과학윤리 쪽으로 관심을 두셔서 아시아생명윤리학회 회장을 지내셨고,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유네스코의 과학기술윤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셨다. 환경운동 쪽으로도 관심을 두셔서 환경운동연합 시민환경대학장을 지내셨다.
선생님은 과학사, 과학철학과 함께 ‘에스티에스(STS)’의 토양도 일궈내셨다.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에스티에스는 1970년대 중엽 이후 발전한 사회구성주의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의 에스티에스(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과학기술학)가 아니라, 그 이전에 활발했던 반전운동, 환경운동, 사회운동으로서의 에스티에스(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과학기술과 사회)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차이는 선생님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가 모이고 학회를 통해서 차이를 포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선생님은 2000년에 일본의 나카지마 히데토 교수, 중국의 쩡궈핑 교수와 함께 동아시아 에스티에스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동아시아 에스티에스 연구자들을 묶어주는 활동을 해 오셨다. 2015년부터 이 일을 내게 넘기셨는데, 아직 동아시아 에스티에스 학회를 만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선생님은 꼿꼿하신 성품으로 유명하시다. 1980년에 서슬이 시퍼런 전두환 신군부를 비판하는 지식인 서명에 참여하셨다가 어렵게 얻으신 대학 전임 자리에서 해직당하셨다. 창조과학에 대해서 비판적인 칼럼을 쓰셨다가 극단적인 기독교인들의 비판을 받아도, 황우석 박사의 잘못을 지적했다가 ‘황빠’들의 비난을 받아도 항상 의연하셨다. 선생님을 오래 따라다녔지만 이런 ‘기개’는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새가슴’ 같은 후학을 보면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선생님은 검소한 성품으로 유명하시다. 술을 좋아하셨지만, 함께 했던 술자리가 끝나고 한 번도 택시를 타시는 걸 본 적이 없다. 덕소로 이사하신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철 시간을 외우셔서 늦어도 지하철 막차를 타고 귀가하셨다. 평생 몇 번 택시를 타셨는지 궁금한데, 아마 10번 이하일 것 같기도 하다. 운전도 안(못) 하셨고, 평생 핸드폰도 안(못) 쓰셨다. 택시비를 아껴서 여러 학회에 큰돈을 기부하시고, 특히 학생을 위한 장학금과 젊은 학자를 위한 상을 만들어서 이들을 독려하셨다. 선생님 덕분에 소장 학자들은 이력서 수상 칸에 한두 줄씩 쓸 게 늘어났다.
선생님은 유독 학회를 사랑하셨다. 선생님이 나가시는 많은 학회가 선생님이 만드셨거나, 창립 회원이나 초기 회원으로 활동하셨거나, 회장을 역임하셨거나, 친구나 후학이 있는 곳이어서 그러신 것 같다. 내가 학회를 빼먹으면 다음에 만날 때 “지난번 과학사학회에는 왜 안 왔나?” 하셔서 학회에 안 가기 어려웠다. 가끔, 학회에서 선생님이 안 계실 때면 마음이 허전했다. 이제 앞으로 계속 그러리라고 생각하니 슬픔이 올라온다. 선생님의 소년 같은 웃음이 그립다.
홍성욱/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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