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이 띄운 상법 개정 패키지…‘이사 충실의무’ 허수아비 만들라
지배주주 권한 남용 견제할 민사적 수단 강화해야
정부가 추진중인 이사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을 배임죄 폐지 등과 함께 묶어 추진해야 한다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주장을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지배주주의 권한 남용을 견제할 민사적 수단이 미비한 한국 현실에선 이 같은 ‘패키지 딜’이 되려 망루탄주(성긴 그물로 배가 지나간다는 뜻) 격으로 상법 개정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원장이 지난 14일 제안한 상법 개정 패키지 딜의 요지는 이사의 충실의무와 책임을 회사뿐 아니라 주주를 포함하도록 명시하되, 그로 인한 민·형사상 처벌 가능성을 없애거나 줄여주겠다는 것이다. 현재 상법 382조3에선 이사가 “회사를 위하여” 일한다고 돼 있는데, 여기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 등 문구를 추가하는 게 뼈대다. 지배주주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일반주주에게 손해를 입히는 결정을 이사회가 내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재계는 이 같은 개정이 이뤄지면, 주주 손해를 이유로 이사가 업무상 배임죄로 기소당하거나, 손배소가 무더기로 제기될까 우려한다. 그러자 이 원장이 꺼내든 카드가 배임죄 폐지다. 이 원장은 ‘민사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경영 판단에 따른 분쟁이 형사 처벌 대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 같이 제안했다. 형사적 책임 뿐 아니라 민사적 책임 대해서도 면책 조항을 제시했다.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일반주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독립된 전문가 의견을 구하거나 △이사회가 최선의 노력을 다했거나 △주식매수청구권 부여 등 충분한 이해관계 조정 노력을 거쳤다면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 ‘경영판단의 원칙’을 법에 명문화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원장의 진단에는 동의하면서도, 해법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미국 등 선진국과 달리 이사 행위로 손해 본 일반주주가 이를 민사적으로 해결할 수단이 한국은 아직 미비하기 때문에 배임죄 폐지·축소는 섣부르다는 것이다. 이상훈 경북대 로스쿨 교수는 “우리나라는 민사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 보전도 쉽지 않은 데다가, 디스커버리제도(회사가 독점한 정보를 원고와 공유하도록 강제하는 제도)가 없어 원고가 손해 입증하기가 어려운데 입증 책임 전환도 잘 안 되다보니 배임죄에 과도하게 의존해왔던 게 사실”이라며 “증거 수집 기능이 있는 검찰이 발휘하던 강력한 억제 효과가 있는데, 배임죄를 없애려면 민사 절차를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별도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했다. 배임죄 폐지 등 형사적 규율을 없애는 것보다 민사 구제 방안을 확대·강화하는 게 우선이라는 얘기다.
손해의 입증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본안 소송 말고, 화해·조정 등 중재에 기반한 분쟁 해결 제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상법 전문 교수는 “선진국에서는 소송 전 합의를 통한 자체적 시정이나 재판 중 화해 등을 통해서도 주주 이익이 보호되는 데 한국은 판결을 통해 이사 개인이 사적 배상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인 점도 기업이 남소 우려를 제기하는 배경”이라며 “화해 등을 통한 분쟁 해결도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도 강조했다.
이 가운데 이 원장이 제시한 경영판단의 원칙까지 명문화될 경우 민사적 구제 수단이 퇴행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경영판단의 원칙이 규정하는 절차적 요건으로만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 이행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에, 자칫 상법 개정 자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셈이다. 천준범 변호사는 “절차를 장악한 지배주주가 이런 규정을 이용해 오히려 면죄부를 얻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상훈 교수는 “구체적 면책 요건을 규정하는 건 불확실성 해소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미국처럼 전원 독립된 이사로 구성된 위원회의 승인과 비지배주주 과반의 동의를 구하는 등 엄격한 절차적 요건을 명문화하는 게 아니라면 지배주주의 이해상충 거래에 대하여 실효성 있는 주주 이익 보호가 이뤄질 거라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남지현 기자 southj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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