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쳤다가도 다시 차오르는 희망… 삶에는 수평이 없다 [작가와의 대화]

최진숙 2024. 6. 18.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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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시인의 고통이여 나의 친구여 !
리듬은 생명이다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떨림을 생각해 보라. 첫사랑의 떨림, 초등학교 입학식의 떨림… 그런 것들이 다 리듬이다. 생명은 리듬으로 성숙하고 리듬으로 환희를 느끼고 삶의 이유를 찾아낸다. 자연은 언제나 축제다. 시리도록 감사하고 언제나 경탄하는 대상이다. 자연이 철학이고 자연이 바로 성경이다. 사계절을 넘어가는 것은 가장 큰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일주일에 두어 개쯤 약속이 있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래야 리듬이 있다. 두 달쯤 후에 보내야 하는 원고 청탁이 두어 개쯤 있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래야 리듬이 있다. 이삼 주 후에 강의가 두어 개 있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래야 리듬이 있다. 날마다 아침이면 세상 이야기를 전해주는 신문이 있고 무감각하게 켰다가 질풍노도(疾風怒濤)의 뉴스, 드라마, 영화를 보고 몸이 어떠냐고 가끔 전화해 주는 친구가 오늘은 잔치국수라도 먹자고 하면, 이만하면 행복하게 노후를 보내는 것이다.

그래도 쓸쓸한 마음이 몸을 알리면 자연을 보면 된다. 자알 보면 자연은 언제나 축제다. 무상으로 바라보는 자연은 시리도록 감사하고 언제나 경탄하는 대상이다. 자연이 철학이고, 자연이 바로 성경이다. 사계절을 넘어가는 것은 가장 큰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옷이 마음이 모두 더불어 새로운 경험으로 넘어간다. 그러므로 리듬은 생명이다.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그 어떤 사물도 그냥 스치지 않고 사유를 가지고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주변에는 자연이 있으니 나와 자연과 사람들이 너울을 만들어 가며 리듬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한 산이나 거리에서도 계절을 변화를 보여주며 우리를 감동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준 것은 없는데 받는 것이 너무 많다. 사실 우리가 즐겨야 하는 것이 주변에 너무 많은 것이다. 제아무리 주머니가 비어 있어도 사실 하루에 우리가 버는 것이 많다. 하늘 하나만 쳐다보아도 말이다.

친구가 전화를 했다.

"어떻게 살아?"

"그저 그래."

이게 첫 대화다. 어떤 친구는 "숨 쉬는 운동하며 살아"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다. 별 감동도 긴장감도 없는 대답이지만 모든 걸 비워 낸 늙은이들의 대화 같지만 "그저 그래" 그 안에는 바람과 폭우와 폭염이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루지 못한 간절한 소망이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삶에 대한 열정이 남모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는 아니고 뭔가 더 행동적인 격렬함이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나는 뭔가 바라고 있는데 인생이 왜 이래…. 그래서 "그저 그래" 속에서 꿈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리듬이다. 우리가 바다를 좋아하는 것은 파도 때문이다. 하얀 포말을 만들어 내며 쏴아 하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보면 "속이 시원해진다"고 말한다. 정지상태, 정체된 상태를 거부하는 것이다.

혼자 정지된 것처럼 있을 때 고요히 입으로 무엇인지도 모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은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가벼운 신발을 신고 집 주변을 산책하면서 익숙한 것이지만 눈여겨 바라보는 일도 리듬이다.

한숨을 쉬는 일도, 자고 일어나서 이불을 탈탈 터는 일도 리듬이다. 떨림을 생각해 보라. 첫사랑의 떨림, 생의 역사와 지식의 첫발로 시작되는 초등학교 입학식의 떨림, 새로운 교단에 혹은 회사 첫 출근의 떨림, 새로운 사회경험과 스스로의 안을 느끼는 육체의 떨림…. 그런 것들이 다 리듬이다. 생명은 리듬으로 성숙하고 리듬으로 환희를 느끼고 그 리듬으로 삶의 이유를 찾아낸다.

하늘 보고 땅 보고. 이 자연스러운 순간도 리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행복으로 가는 너울이다. 그러나 몸은 멈추어 있는데 더 격렬한 리듬이 바로 우리 내면의 리듬이다.

내면의 떨림, 손끝이 오그라드는 듯한 떨림이 젊은 시절에는 구멍가게에 사탕처럼 많았다. 그뿐이겠는가.

생이 잘 풀리지 않아 출렁 내려앉는 두려움, 허망함, 다시 두려움이 온 몸을 휘어잡는 일도 사실은 리듬이었다. 삶에는 수평이 없다. 살아보니 그렇다. 바닥을 쳤다가 다시 서서히 오르는 정상적인 생활도, 좌절도, 희망도 리듬이다. 우울과 환희라는 낱말이 그래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대학 시절 어느 교수님이 인생은 살기 나름이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지 말고 너의 기준에 걸터앉아 휘파람도 불고 하늘을 보라고 하셨다. 낭만적인 말이고 개인적인 창의성을 기르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휘파람이란 말이 가장 듣기 좋았다. 그러나 그 교수님의 말은 맞지 않았다. 인생이란 것을 살아 보니 휘파람을 불 시간은 적어도 나에겐 없었다. 휘파람을 불 기운이 있는 나이에는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은 없었다. 모든 게 고통이었는데 어찌 휘파람을 불겠는가. 아마도'그래도 휘파람을 불며 힘을 낼 것'이라는 말이었을까.

더욱 틀린 말은 '네 기준에 걸터앉아'라는 말이다. 휘파람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그 고통의 시간에 '자기 기준'은 자리가 없었다. 나는 빼고 완전히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할 일들이 계속되었다. 인생에게 섭섭하다, 아니 젊은 어느 날엔 내 인생의 뺨이라도 치고 싶었다. 자기 기준, 자기 내면, 나의 할 일을 할 수 있는 노후에 들어서니 꿈의 다리에 힘이 빠진다.

몸이라는 존재는 품위가 낮다고 생각한 젊은 시절이 있었다. 정신이야말로 고급이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아니다. 몸이 최고다. 몸 안에 정신이 있을 것이다. 이제 시간이 있으나 움직일 힘이 없다. 이것이 진실이다. 인생은 자신의 순례길을 가며 통행료를 지불하는 것이다. 한푼도 공짜는 없다. 땀 한방울에 가격이 있다. 나는 나이에 따라 순해진다. 빈정거리지 않는다. 친구와 헤어질 때 손을 잡으며 "다시 보자"라고 인사말을 하고 잠을 자려고 침대 위에 누워서는 나는 나에게 말한다.

"그래 다시 또 살아 보자"라고.

신달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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