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의 사투, 구교환의 개성만 빛난 '탈주' [정지은의 리뷰+]

정지은 기자 2024. 6. 1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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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탈주' 리뷰
이제훈, 구교환 연기만 빛났다
송강, 이솜 특별출연 반갑지만···캐릭터는 '글쎄'
북한말, 하다 마는 배우들? 현실 고증·개연성↓
'탈주' 스틸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서울경제]

"세상에 그런 낙원은 없어."

영화 '탈주'(감독 이종필) 속 이제훈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영화 '레버넌트'(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에서 사지가 찢겼으나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떠오른다. 뛰고 구르고 총에 맞고 늪에 빠져 익사할 뻔하면서도 다시 일어선다.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 죽은 척 위장하고 흙탕물로 세수를 하며 체력을 극한까지 끌어내 빗발치는 총알 사이를 달린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탈주'의 긴박감은 점차 떨어진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액션을 더하고 더했음에도 재미는 오히려 증발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탈주' 스틸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이 글은 '탈주'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쫓기는 이제훈, 쫓는 구교환의 사투 = '탈주'는 북한 병사 규남(이제훈)이 탈북을 꿈꾸지만 그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쫓는 보위부 소좌 현상(구교환)이 나서며 벌어지는 극한의 사투를 그린 작품이다. 출신성분을 떠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 청년 규남은 최전방에서 일하며 틈틈이 탈출 계획을 세우지만 이내 하급 병사 동혁(홍사빈)에게 이를 들키게 되고 불가피하게 함께 탈출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꾼다.

후반부로 갈수록 짐이나 다름없는 동혁까지 끌고 탈주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규남은 더욱 큰 장애물에 맞선다. 이로 인해 이제훈은 한계를 돌파하고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연기하는데 그 힘은 스크린을 뚫고 전해진다. 구교환의 연기 또한 압도적이다. 그가 연기한 현상은 등장부터 개성이 넘치는 인물이다. 매서운 눈빛으로 병사들을 거느리면서도 립밤과 핸드크림을 부지런히 바르며 보습 관리에 신경 쓴다. 이런 부분은 유머 코드로도 작용하며 다소 무거운 작품을 환기시킨다.

'탈주' 스틸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송강·이솜 특별출연에도 서사는 '허전' = 하지만 추격 액션이라는 장르에 걸맞지 않게 서사는 상승과 하강을 넘나드는 곡선이 아닌,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라는 훌륭한 전작을 내놓은 이종필 감독의 신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개연성이 맞지 않는 부분투성이고 현실감이 떨어지다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북한 내 현실에 대해 어떤 부분은 극단적으로, 또 어떤 부분은 이상적으로 그려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 이제훈을 비롯해 출연진 다수의 어색한 북한말 연기 또한 몰입감을 떨어뜨린다. 북한말을 하다 갑자기 긴장이 풀렸는지 은근슬쩍 서울말을 하는 출연진들 모습은 당혹스럽다.

'탈주' 스틸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서사의 공백을 메꾸는 데 처방된 약은 '특별출연'이다. 송강, 이솜 등 대세 배우들을 내세워 규남과 현상의 전사를 완성시키려 했으나 결과는 애매하다. 먼저, 현상의 과거 러시아 피아노 유학생 시절 만났던 동성 연인임을 암시하며 등장하는 송강은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나 2000년대 유행했던 인터넷 소설에 나올 법한 대사들을 줄줄이 읊으며 오히려 극장 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든다.

'탈주’ 기자간담회에서 이 감독은 "관습적이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고 설명했으나 섬세한 시각이 필요한 소재를 이런 방식으로밖에 소비할 수 없었던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아 보인다. 이솜과 신현지 또한 북한 내 유랑민들로 등장하지만 관객들이 계속해서 외면해온 한국형 신파를 그대로 답습하는 중심이 될 뿐이다.

'탈주' 스틸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고증 부족에 탄식만...'탈주' 관객들 만족시킬까 = '탈주'는 기자를 떠나 관련학 전공생으로서 매우 안타까운 작품이다. 북한, 특히 탈북을 소재로 한 작품은 현실 고증과 픽션 사이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관건이다. 너무 다큐멘터리로만 가면 흥미가 떨어지고, 그렇다고 너무 픽션에 가까우면 관객들의 공감도가 줄어들기에 그 사이에 두는 무게추의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탈주'는 픽션을 넘어 판타지에 가깝다. 규남이 밤새도록 지도나 나침반 없이 비무장지대를 달리는데도 지뢰 하나 터지지 않으며, 조준경도 없는 소총으로 자신을 포착하려는 서치라이트를 한 발의 오발도 없이 박살 낸다. 이 정도 실력이면 군대를 탈주할 것이 아니라 '인민 대표 스나이퍼'로 인정받는 것이 더 윤택한 삶을 보장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탈주' 스틸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군사분계선에 북한 군복을 입은 군인이 다가오는데도 대한민국 국군은 대응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군사분계선 너머에 있는 규남을 보호하고 끌어당겨 남쪽으로 데려오기까지 한다. 당장 메인 검색 포털에 '북한군', '군사분계선'이라는 키워드만 쳐도 지난 9일, 그리고 오늘(18일) 북한군 다수가 비무장지대를 침범해 경고사격을 날렸다는 보도를 확인할 수 있는 세상에 '탈주'의 서사는 비현실을 넘어 꿈과도 같다.

이러다 보니 기자간담회에서 "현실 고증을 철저히 했다"는 이 감독의 말은 신빙성을 잃는다. 그가 언급한 북한 내 현실에 대한 조사와 탈북민에게 들은 이야기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작품은 거부감을 사기 마련이다. 영화 티켓값이 관대하지 않은 지금, 많은 신들이 물음표인 '탈주'에게 관객들이 관대한 한 표를 투자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정지은 기자 je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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