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화이부동] 아부의 저주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2024. 6. 18.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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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화백

“아부의 친구는 자기만족이고 그 시녀는 자기기만이다.” 이탈리아 사상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1513)에서 한 말이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부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다면 군주는 아부의 먹이가 되고 만다. 궁정에 아부꾼이 가득하다면 매우 위험한 사태가 초래될 수 있다. 사람이란 자신의 일에 몰입해서 만족하게 되면, 그것에 미혹되어 해충 같은 아부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꼭 아부를 해야겠다면, 이탈리아 외교관이자 작가인 발다사레 카스티글리오네가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 처세서 중 최고로 꼽히는 <조신론>(1528)에서 제시한 다음 원칙을 따르는 게 좋겠다. “아부를 하려거든 우아하게 하라. 진짜 재주는 기술적으로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렇게 하는 걸 자연스럽게 숨기는 일이다.”

하긴 아부를 비판했던 마키아벨리도 ‘우아한 아부’엔 능한 인물이었다. 미국 언론인 리처드 스텐걸의 <아부의 기술>(2006)이란 책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군주론>을 헌정했던 당대 권력자 로렌조 디 피에로 데 메디치에게 “최고의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고(보통 아부꾼도 그 정도의 발언은 할 줄 안다), ‘시대가 위인을 찾고 있는데, 오직 로렌조만이 시대의 공백을 채울 수 있을 뿐’이라고 아부했다”고 한다.

권력자들은 짐짓 자신이 아부를 싫어한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런 말은 믿지 않는 게 좋다. 미국 철학자 랠프 왈도 에머슨이 “아부에 현혹당하지는 않을지라도 아부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사람들이 아부를 좋아하는 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군가 비위를 맞춰줘야 할 만큼 중요한 인물임을 실감케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인물임을 실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부하의 절대적 충성을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아부에 약하다. 그 어떤 경우이건 아부는 꼭 그 내용이 중요한 건 아니다. 우아하지 않은 아부일수록 아부를 하는 쪽의 충성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환영을 받을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다.

한국 정치판은 어떤가? 더불어민주당부터 살펴보자. 2021년 11~12월 대선 캠페인의 일환으로 민주당이 기획하고 조장한 ‘재명학’ 열풍은 보기에 따라선 ‘아부 신파극’을 방불케 했다. 강성 팬덤이 “SNS 활동이 저조한 의원 하위 80%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겁을 준 탓인지는 몰라도, 의원들은 ‘재명학’의 교재인 <인간 이재명>을 읽은 독후감을 SNS에 올리기 바빴는데, 다음 독후감에 1등상을 주어도 무방할 것이다.

“인간 이재명 책을 단숨에 읽었다. 이토록 처절한 서사가 있을까? 이토록 극적인 반전의 드라마가 또 있을까? 유능한 소설가라도 이 같은 삶을 엮어낼 수 있을까?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인간 이재명과 심리적 일체감을 느끼며 아니 흐느끼며 읽었다.”(정청래)

정치판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50대 후반의 정치인을 이토록 흐느끼게 만들 수 있는 이재명의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걸까?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모두가 다 그렇게 흐느낀 건 아니었으며, 민주당 내의 아부 문화가 매우 심각하다고 본 이들도 있었다. 특히 지난 4·10 총선을 앞두고 공천 문제가 불거졌을 땐 환멸을 느낀 의원들이 많았다. 예컨대, 설훈은 “저는 40여년 동안 몸담고 일궈왔던 민주당을 떠나고자 이 자리에 섰다”며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어떻게 아부해야 이재명 대표에게 인정받고 공천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만 고민하는 정당이 되어버렸다”고 개탄했다.

최근엔 이재명 맞춤형 당헌·당규 개정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민주당 원내대표 박찬대는 지난 12일 당무위원회에서 당헌·당규 개정안의 의결이 이뤄졌다고 밝히며 “이재명 대표가 너무 반대를 많이 해서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최고위원회의에서도 (이 대표가) 반대했고 오늘 또 반대했다”며 “개정안이 대표를 위한 것이 아니고 보완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개정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이 대표가 너무 착하다. 나보다 더 착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번 개정은 이 대표를 위한 게 아니다. 해당 조항에는 예외가 없기에 보완이 필요한 것”이라면서 “이 대표가 너무 반대하길래 ‘그냥 욕먹으시라, 욕을 먹더라도 일찍 먹는 게 낫다’고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이건 아부인가, 아닌가? 그냥 웃음만 나온다. 표현 방식이 너무도 현란해 어지럽다.

올 2월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던 한동훈은 “민주당은 아첨꾼만 살아남는 정글이 됐다”는 독설을 퍼부었지만, 국민의힘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특히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한 윤석열이 지난해 2월 대선주자급 당내 인사들의 침묵을 강요했던 거친 고압적 방식이 시사하듯이, 그는 사실상 자신에 대한 고언의 통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고언자들을 박해하는 자해를 저지르지 않았던가.

윤석열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2년 1월 “정치에 아부하는 공무원은 새 정부서 솎아내겠다”고 큰소리쳤다. 대통령 당선 직후인 3월엔 “일부 참모가 당시 후보이던 윤 당선인에게 듣기에 좋은 말만 하자 ‘아부하지 말라’며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통령이 된 후 영 다른 모습을 보인 건 분명했다.

취임 100일 성적이 영 신통치 않자 전 의원 유승민은 윤석열을 향해 “아부만 하는 주변인들을 바꾸고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할 사람을 가까이 둬야 한다”고 했다. 피가 되고 살이 될 좋은 조언이었지만, 윤석열은 따르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아내 김건희를 절대 성역화하면서 그러면 안 된다는 고언에 핏대를 올렸다는 기사들이 나왔지만 반론은 없었다. 여권 인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실상 “아부 이외엔 어떤 말도 듣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었기에, 고언이 사라졌다. 윤석열은 그게 국정운영에 미칠 가공할 악영향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때 ‘보수의 희망’이었던 자신이 ‘보수의 악몽’으로 전락해가는 걸 깨닫지 못했다.

지난 10일 국민권익위원회가 김건희의 비위(명품 가방 수수) 신고 사건을 ‘위반 사항 없음’으로 종결 처리했다고 발표한 ‘사건’을 보자. 권익위는 청탁금지법에 공직자 배우자 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에 사건을 종결한다고 밝혔다. 여론은 들끓었다. 신문들은 일제히 사설을 통해 비판했다. 두 개만 감상해보자.

“국민을 배반하고 권력자에게 굴종하는 권익위는 존재 이유가 없다. 김 여사를 둘러싼 각종 의혹은 특검을 통해 밝혀야 한다는 사실만 다시 확인됐다.”(경향신문) “영부인이 대통령인 남편을 이용해 금품을 챙겼다면 국가적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수사 의뢰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면죄부를 주다니, 권익위는 대통령 부부를 위한 권익위인가.”(한겨레)

‘권력자에게 굴종하는 권익위’ ‘대통령 부부를 위한 권익위’라면, 권익위가 그들에게 아부를 했다는 것일 텐데, 일단 넓은 의미의 아부로 간주하기로 하자. 개인과 기관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이재명을 향한 아부엔 나름의 적극성과 창의성이 살아 있는 반면, 윤석열을 향한 아부엔 그게 없다. 수동적인 시늉에 가깝다. 아니 아부라기보다는 대통령의 격노를 두려워하는 ‘면피용 방어기제’만 발달한 느낌이다. 언론이 지적한 것처럼, 법적인 미비점이 문제라면 어떻게 고치자는 이야기라도 하고, 공직자의 배우자가 그런 선물을 받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과 판단을 제시하는 게 도리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걸 몰라서 그랬을까? 그럴 리 없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생각 때문이었을 게다.

“대통령 부부의 안전은 물론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고난도의 창의성을 발휘하면서 김건희를 호되게 꾸짖는 동시에 좋은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다. 특검을 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건 너무도 위험한 모험이다. 대통령은 격노와 어퍼컷의 달인으로서 대한민국 최고의 불통이며 이해 수준은 매우 낮고 공감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건 말건 신경쓰지 않으면서 대통령의 수준과 눈높이에 맞게끔 구는 게 대통령에 대한 예의다. 정부 부처와 공적 기관은 대통령을 닮는 법이다. 우리는 일심동체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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