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생각을 바꾸는 건 왜 그토록 어려운가
아포리아(aporia)는 ‘길(poros)이 없음’을 뜻한다. 길이 없기에 난관이고 장벽이다. 그 아포리아를 뚫는 것이 우리의 집단적 지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인식의 장벽이 무너졌듯이, 우리의 집단적 지혜가 공성 무기가 돼 무지의 장벽을 뚫으면 이 사회의 진전을 가로막고 선 저 성채도 무너질 것이다.
은유학(Mataporologie)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문학적 은유의 힘이 철학적 개념의 힘보다 세다고 말한다. 은유는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게 해주는 인식의 도구다. 은유야말로 개념적 사고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탐사하는 데 길잡이 노릇을 하는 ‘아리아드네의 실’이다. 은유가 없다면 인간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로 그려낼 수 없다. 은유의 힘을 빌려 인류는 앎의 지평을 거의 무한대로 넓혔다. 그렇다면 은유는 ‘앎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는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는 데 은유가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텍스트다.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을 대리하는 소크라테스는 배움의 열정으로 가득 찬 젊은이 테아이테토스와 함께 도대체 ‘앎’(에피스테메, episteme)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물어 나간다. ‘앎에 대한 앎’이 이 대화편의 주제다. 대화는 초반부터 긴장의 수위가 사뭇 높다.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말문이 막힌 테아이테토스는 ‘무언가 알 듯 말 듯 한 것이 안에서 부풀어오르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해 괴롭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다’고 토로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임신’과 ‘산고’라는 은유를 빌려 테아이테토스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한다. “테아이테토스, 그건 그대가 임신 중이라 산고를 겪는 것이네.” 테아이테토스는 자기 안에서 생각이 자라나 꿈틀거리는데도 그 생각을 끌어내지 못해 진통하는 중이다.
소크라테스는 ‘산파’의 은유도 불러들인다. “그대는 내가 산파 파이나레테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어보았겠지?” 테아이테토스가 들어보았다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다시 묻는다. “그럼 내가 같은 일에 종사한다는 말도 들어보았겠군?” 소크라테스 자신도 ‘산파’라는 얘기다. 소크라테스 어머니는 아이의 출산을 돕는 ‘몸의 산파’이고, 소크라테스는 생각의 출산을 돕는 ‘혼의 산파’다. 몸의 산파나 혼의 산파나 산고를 덜 겪고 출산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점에서 같은 부류다.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에게 자신과 함께 대화하다 보면 마침내 앎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이 바로 앎을 낳도록 돕는 산파술이다. 소크라테스는 앎의 산파다.
플라톤의 이 대화편이 구사하는 앎의 은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참된 앎이 무엇인지 물어가는 중에 플라톤은 ‘밀랍’이라는 은유를 불러낸다. 우리 마음에 밀랍으로 된 서판이 있으며 그 밀랍에 새겨진 기억이 앎의 바탕을 이룬다. 그리하여 우리가 경험하는 외부 대상이 마음의 밀랍 서판에 찍힌 기억과 일치할 때, 그것을 우리는 ‘올바른 판단’이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보고 소크라테스인 줄 알아보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다. 이 올바른 판단이 앎이다. 우리의 감각적 경험이 우리 안의 기억과 일치할 때 올바른 판단, 곧 참된 앎이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판단은 밀랍 서판에 찍힌 기억이 얼마나 뚜렷하냐에 달렸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밀랍이 무르면 쉽게 배우지만 쉽게 잊어버리고, 밀랍이 딱딱하면 잘 배우지 못하지만 일단 익히고 나면 잘 잊지 않는다. 밀랍에 돌이나 흙이 섞여 있으면 기억이 선명히 새겨지지 않고, 서판이 너무 작으면 서로 포개져 찍히는 탓에 기억이 엉킨다.’ 우리의 기억이 뚜렷해야만 우리가 경험하는 외부 대상이 무엇인지 그 기억에 맞춰 잘 판단할 수 있다. 기억이 선명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소크라테스로 착각할 수도 있다. 플라톤이 밀랍 은유로 이야기하는 앎은 ‘기억과 경험의 일치’를 뜻한다. 그러나 이런 앎은 우리의 앎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앎의 폭은 훨씬 넓다.
앎을 좀 더 분명히 정의해보려고 플라톤은 밀랍에 이어 ‘새장’의 은유를 불러들인다. ‘앎이란 우리 영혼 속 새장에 들어 있는 새와 같다.’ 새장의 비유에서 앎은 두 단계를 거친다. 바깥세상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를 붙잡아 새장에 가두는 것이 첫 단계다. 인간 영혼 안의 새장은 아주 커서 수많은 새들로 북적거린다. 새들은 집단을 이루어 한곳에 모여 있기도 하고 홀로 떨어져 있기도 하며 새장 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새장 안에 있다고 해서 그 새가 곧 앎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장의 새를 다시 움켜잡아야만 새는 내 앎이 된다.
플라톤의 이 비유는 ‘잠재적 앎’과 ‘현실적 앎’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우리의 영혼 안에는 배워서 얻은 무수한 앎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배워 내 안에 넣었다고 해서 바로 내 앎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서 날아다니는 새를 실제로 움켜잡아야만 내 것이 된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앎을 다시 잡아 익혀야 그 앎은 현실적인 앎이 된다. 그러지 않은 앎은 새장 안에서 날아다니는 새처럼 내 것이되 내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새장 은유는 앎의 두 차원을 선명히 그려 보여준다. 잠재적 앎이 현실적 앎이 될 때 우리는 그 앎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새장의 은유는 앎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돼 있는지는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밀랍 모델이나 새장 모델은 우리의 앎을 너무 좁게 해석한다. 앎은 경험과 기억의 일치만도 아니고, 내 안에서 앎을 다시 붙잡는 일만도 아니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시도를 이어받아 우리의 앎이 어떻게 커가는지 우리 나름의 은유를 사용해 다시 그려볼 수도 있다. 앎을 네트워크라고 하면 어떨까. 앎을 알아가는 것은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과 같다. 거미줄의 작은 떨림이 전체를 울리듯, 앎이 네트워크를 이루면 새로운 앎의 파장은 네트워크 전체로 퍼진다. 네트워크의 한곳이 끊어져 있다면 끊어진 곳을 이음으로써 앎의 그물을 더 촘촘히 짤 수도 있다. 앎이 네트워크를 이루면 거미줄이 먹이를 잡듯이 우리는 인식의 그물로 많은 것을 잡을 수 있다.
앎을 나무의 은유로 그려볼 수도 있다. 막 싹이 튼 어린나무가 햇볕과 양분을 받아 자라 오른다. 우리의 앎이 자라는 방식은 산술급수적이기보다는 기하급수적이다. 체적으로 계산하면, 지름 30㎝인 나무는 지름 1㎝인 나무보다 30배 더 큰 것이 아니라 수천배 더 크다. 앎은 축적될수록 더 많은 앎을 낳는다. 우리의 앎은 가지를 뻗어 위로 자랄 뿐만 아니라 뿌리를 내려 밑으로도 자란다. 앎은 높이 자람과 동시에 깊이 자란다. 그렇게 자란 나무는 몸통과 가지와 잎이 하나로 연결돼 서로 지탱하는 살아 있는 전체를 이룬다. 개인의 앎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집단의 앎, 집단의 지혜도 그렇게 자란다. 집단적 지혜의 나무는 그늘을 넓게 드리워 사람들에게 생각의 공간을 내어준다. 그런가 하면 집단적 지혜의 나무로 무지의 장벽을 부수는 공성 무기를 만들 수도 있다.
‘테아이테토스’에서 플라톤은 앎을 일종의 소유로 그린다. 새장에 새를 잡아 가두고 그 새를 다시 손으로 움켜쥔다는 그 표현부터가 앎이 소유임을 암시한다. 더 명확하게 앎을 소유로 그리는 대목이 대화 초기의 임신과 출산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플라톤은 ‘산고 끝에 낳은 첫아이를 지키려는 산모’를 비유로 끌어들인다. 누군가 아이를 빼앗아 가려 하면 산모는 자기 아이를 지키려고 물불 안 가리고 덤빈다. 아이는 산모의 것이다. 앎을 낳아 품은 사람도 첫아이를 낳은 그 산모와 똑같이 행동한다. 설령 그 앎이 그릇된 앎이더라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 그 앎이 참된 앎이 아님을 밝혀 없애려 하면, 아이를 빼앗기는 산모처럼 그릇된 앎을 지키려 사납게 덤벼든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한번 들어앉은 생각을 바꾸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잘못된 앎은 우리의 길을 막는 무지의 장벽이다. 이 벽이 버티고 있는 한 세상은 전진하지 못한다. 진보가 집권하면 나라를 통째로 들어 공산당에게 바칠 거라느니 휴전선 이북에서 언제 밀고 내려올지 모른다느니 하는 믿음이 그런 무지의 장벽이다. 믿음은 낡았어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길을 막는다. 그 무지의 장벽이 분단 기득권 세력을 지켜주는 성벽 노릇을 한다. 그리스어 ‘아포리아’(aporia)는 ‘길(poros)이 없음’을 뜻한다. 길이 없기에 난관이고 장벽이다. 그 아포리아를 뚫는 것이 우리의 집단적 지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인식의 장벽이 무너졌듯이, 우리의 집단적 지혜가 공성 무기가 돼 무지의 장벽을 뚫으면 이 사회의 진전을 가로막고 선 저 성채도 무너질 것이다.
고명섭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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