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낙스 파산 전 ‘서드 임팩트’ 왔다…‘에바’ 안노 감독의 분노

홍석재 기자 2024. 6. 18. 11: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말하는 파산 뒷얘기
에반게리온 누리집 갈무리

“현재 가이낙스에 에반게리온 제작과 관계된 사람은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한 획을 그은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의 연출자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지난 2019년에 한 말이 최근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7일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탄생시킨 회사 ‘가이낙스’가 돌연 파산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배경에 관심이 쏠렸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매체 ‘다이아몬드 온라인’은 안노 감독이 5년 전 가이낙스에 대해 쓴 기고문 ‘에바의 이름을 악용한 가이낙스 관련 보도에 강력히 분노하는 이유’가 지난주 인기 기사 1위에 올랐다고 최근 밝혔다.

재소환된 2019년 안노 감독 기고문을 보면 가이낙스 경영 악화에 대한 안노 감독의 주장을 비교적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안노 감독의 기고문에 따르면 회사 창립 이후 큰 성공이랄 게 없었던 가이낙스는 1995년 텔레비전 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대성공으로 갑자기 막대한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애초 가이낙스는 1984년 창립자인 야마가 히로유키 감독이 극장용 애니메이션 ‘왕립 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1987)를 제작하기 위해 세운 회사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것’이라는 뜻의 합성어다. 시마네현 인근에서 ‘엄청나다’는 뜻으로 쓰는 방언 ‘가이나'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라는 뜻의 ‘엑스’(X)를 합쳐 만든 말이다.

안노 감독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대성공이 오히려 독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첫 성공 뒤 10여년간 가이낙스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주장했다

“가이낙스라는 회사 전체가 별다른 사업 계획도 없이, 비용도 무시한 ‘낭비 경영’이 일상화된 게 이 무렵이라고 생각됩니다. (…) 많은 돈과 인력을 투입하고도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손실만 남긴 기획과 사업들이 많았습니다. 경영진과 업무 담당자들은 여러 차례 실패하고도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회사에) 돈이 많이 있으니 (실패를 책임지는 데) 신경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 정작 작품 제작 때 가장 고생한 스태프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수익보다 낭비가 심해졌고, ‘에바’ 때문에 수익이 발생한다는 객관적 사실을 젖혀두고, ‘에바’를 계속 이용만 하는 경영으로 회사가 변질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99년에는 가이낙스 당시 대표이사가 고액의 탈세 사건을 일으켰다. 안노 감독은 에바 시리즈를 방송하던 ‘테레비 도쿄’에 찾아가 영문도 제대로 모른 채 사과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안노 감독 주장에 따르면, 이후 새로 부임한 대표이사는 “안노 감독의 이름이 (가이낙스) 이사 명단에 들어있지 않으면 아무도 회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름만이라도 좋으니 이사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고,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2003년께가 되자 가이낙스 경영은 이미 기울어졌다. 안노 감독은 “그때서야 이사로서 사내 경영 서류와 수치를 확인했는데, 거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급여가 계속 지급됐고 실적이 없는 일부 직원에게 ‘에바’를 위해 노력한 직원들보다 훨씬 높은 급여가 지급된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고 주장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의 한 장면. 가이낙스 제공

안노 감독은 2006년 가이낙스를 떠나 ‘카라’(khara)라는 회사로 독립했다. 처음에는 후배 한명과 둘이서 차린 작은 회사였다. 가이낙스 이사직은 그만뒀다. 가이낙스 요청으로 1년여간 ‘직원’ 직함을 유지했지만, 그나마 이듬해 자리를 내려놨다. 그는 “당시 극장판 에반게리온을 만들기로 했는데, 가이낙스를 제작사로 선택하지 않았다”며 “가이낙스의 제작비 관리 문제와 스태프와 직원들의 복리후생, 작품이 성공했을 때 기여한 이들에게 환원하는 문제 등을 제대로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에반게리온 첫 제작은 가이낙스를 통해 시작된 게 맞지만, 현재 이 회사는 에바 시리즈에 대한 제작·저작권 등에서 사실상 아무 관계가 없는 회사가 됐다. 그는 “제가 가이낙스가 아닌 곳에서 에반게리온을 만드는 것은 ‘에바는 안노의 것’이라는 이유로 곧바로 인정받았고, 상품화와 로열티도 (카라에서) 받을 수 있었다”고 적었다.

다만, 이후에도 한동안 안노 감독은 에바 관련 판권 관리와 상품화 창구를 가이낙스에 맡겼다. 그는 “당시 ‘카라’의 인력이 부족했고, 가이낙스의 판권 담당자가 작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윈-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가이낙스 쪽의 납득하기 어려운 방만 경영이 계속 됐다고 주장했다. 카라 쪽에 줘야할 로열티를 제때 지급하지 못하는 일들이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가이낙스는 이미 에반게리온이나 안노 감독과 전혀 관계없는 회사였는데, “가이낙스 인수를 고려하고 있다는 외국 기업으로부터 ‘회사를 인수하면 안노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 줄 수 있느냐’”는 문의를 받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2014년부터는 ‘후쿠시마 가이낙스’, ‘요나고 가이낙스’, ‘주식회사 가이낙스 웨스트’, '주식회사 가이낙스 니가타’ 같은 회사들이 가이낙스의 자회사 같은 형태로 잇따라 설립됐다. 안노 감독은 “가이낙스라는 이름이지만 에바와 전혀 관계없는 회사들이었는데, 후쿠시마 가이낙스 같은 경우 틈만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마치 ‘에바’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떠올렸다. 2019년 가이낙스 대표가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체포됐을 때도, 에반게리온과 관련된 듯한 보도가 이어졌다. 이후에도 각종 사건·사고가 이어진 끝에 지난 7일 가이낙스는 자사 누리집에 파산 공지를 띄웠다.

카라는 가이낙스 파산 때 누리집에 “4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이낙스)가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어 안타깝게 생각한다. 가이낙스(GAINAX)의 상표, 명칭에 관해서는 가이낙스사 공지에도 나와 있듯이 당사(카라)에서 취득·관리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