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사도광산 은폐는 고도성장의 뿌리 감추기?[김상운의 빽투더퓨처]

김상운 기자 2024. 6. 18. 11: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4] 日 전시경제와 고도성장의 역사

최근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에서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누락하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에서 메이지시대 유산을 삭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일본이 강제징용의 역사를 감추기 위해 이런 무리수를 두는 이유는 뭘까.

이번 회는 사도광산의 역사가 일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고도 경제성장과 구조적으로 직결돼 있다는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는 오랫동안 식민지에서 자본축적으로 번영한 서구 유럽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미쓰비시 재벌화’에 기여한 사도광산

20세기 초반 사도광산에서 광부들이 굴착 작업을 하는 모습. 동아일보DB
문제의 사도광산은 16세기에 은을 캐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17세기에는 에도막부의 주요 재원으로 쓰였으며, 근대화 이후 메이지시대인 1889년에는 미쓰비시 소유가 돼 비약적인 생산 증대를 이루죠. 일본 정부가 꼼수를 부려 등재 신청서에서 삭제하려는 시기가 바로 이 메이지시대입니다.

메이지유신 2년 뒤인 1870년 설립된 미쓰비시는 현재 시가총액이 약 500조 원에 이르는 일본의 대표적인 대기업 집단입니다. 자동차, 금융, 중공업, 식품 등 다양한 산업분야에 걸쳐 약 1000여 개에 이르는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죠. 2차대전 당시 일본군 주력 전투기였던 ‘제로센’을 만드는 등 군수산업을 운영하며 조선인, 중국인 강제징용의 특혜를 본 대표적인 전범기업이기도 합니다.

사도광산뿐 아니라 2015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군함도(하시마) 해저 탄광도 미쓰비시 소유로 조선인 강제징용이 이뤄진 현장입니다. 한마디로 식민지 시절 조선인들의 땀과 피를 쥐어짜 이를 발판으로 세계적인 재벌이 된 겁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마찬가지로 미쓰비시도 강제징용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는 중일전쟁 이후 사도광산에 군수공업 지원을 위한 동양 최대 선광장(選鑛場)을 세운 뒤 약 2000여 명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합니다. 사도광산뿐 아니라 이곳이 소재한 니가타현에만 패전 전후로 9763명(1945년 11월 기준)의 조선인이 집단 거주하는 등 일대 중화학 공업을 지탱한 핵심 노동력으로 쓰였습니다.

일본 고도성장 이끈 전시 동원체제

일본 사도광산 내부 갱도. 전시 약 2000여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이곳에서 일했다. 사도광산 페이스북
흔히 일본의 고도성장은 전후 복구를 거쳐 한국전쟁을 거치며 시작된 걸로 봅니다. 한국전쟁 당시 막대한 군수공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미쓰비시의 사례가 보여주듯 한반도에서 뿌려진 피가 일본 경제를 일으킨 것은 팩트입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당시 식민지 경제와 조선인 강제동원이 이뤄진 전시 경제체제가 일본의 고도성장 모델과 직결돼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고도성장기 일본 경제의 뿌리가 전시(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총동원 시기에 형성됐다는 일본 경제사학자 오카자키 데쓰지의 ‘전시원류론(戰時原論)’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전쟁 전 일본 제국의 자본주의를 앵글로색슨형 자본주의로 보고, 전시에 구축된 국가 주도의 계획통제형 경제 시스템이 전후 고도성장의 요인이 됐다고 설명합니다.

야마자키 히로아키 역시 전시 중화학 공업화 과정에서 재벌에 대한 자본 집중이나 은행 간 협조 융자 등 일본 특유의 독점적 조직화가 이뤄졌다고 봅니다. 전후 일본에 들어선 미 군정이 일본 재벌 해체에 나서지만, 마침 전개된 미소 냉전으로 일본 경제발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이런 개혁 조치는 유야무야됩니다. 그러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쓰비시 등 일본 재벌의 부흥이 이뤄지게 되죠.

일본 식민지 경제와 한반도

영화 ‘군함도’의 한 장면. 군함도 역시 조선인 강제징용 현장이지만,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 등재 후에도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일본은 한반도에 이어 만주를 지배하면서 본토 경제를 뒷받침하는 배후 생산기지로 식민지를 이용하는 경제구조를 만듭니다. 이른바 만선일여론(滿鮮一如論)을 내세워 조선과 만주를 통일적으로 경영하려고 하죠. 이후 중일전쟁에 이어 동남아시아 침공에 나서면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광역경제권을 구축하겠다며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주창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철저히 본토 경제의 관점에서 식민지 산업을 운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해방 직후 남북한이 불균형한 산업구조로 고통을 받은 원인이 됩니다. 즉 남한을 식량 생산기지로, 북한을 중화학 공업기지로 각각 운용하며 본토 경제에 종속시키는 전략을 취한 겁니다. 이 때문에 패전으로 일본 본토 경제와 단절된 남북한 산업은 마비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남북 분단으로 상호 경제교류마저 막히면서 북한은 식량부족, 남한은 공업물자 품귀로 어려움을 겪게 되죠.

서구 식민지 경제와도 닮은꼴

19세기 프랑스 화가 제롬의 ‘터키탕의 여인’. 백인 여성의 관능미를 부각하기 위한 수단으로 흑인 노예를 나란히 배치했다. 유럽인들의 식민 지배는 흑인 등 피지배 인종을 철저히 객체화하는 차별적 시각을 낳았다. 동아일보DB
15세기 대항해시대와 더불어 시작된 유럽 식민지배는 근대 자본주의 역사에서 일종의 본원적 자본축적(primitive accumulation) 역할을 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 절대왕정에 맞서 시민의 자유를 부르짖은 대혁명기에도 마찬가지였죠. 유럽은 물론 신대륙 아메리카의 초기 경제체제가 거대한 노예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프랑스혁명 2년 뒤인 1791년 카리브해 생도맹그(현 아이티)에서 벌어진 노예반란이 이런 유럽 식민주의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생도맹그의 흑인 반란 노예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의회에서 채택된 ‘인간 및 시민의 권리선언’의 첫 문장(‘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을 명분으로 노예주와 맞섭니다. 하지만 프랑스인 노예주들은 영국군을 끌어들이며 노예들과 싸우죠. 이들의 머릿 속에서 인간 평등의 권리선언은 노예나 여성은 제외돼 있있던 겁니다.

일본, 서구 제국주의 역사 잊지 말아야하는 이유

일본 나가사키현 군함도의 실제 모습. 이곳에는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작업한 미쓰비시 소유의 해저 탄광이 있었다. 동아일보DB
인류사에서 다른 인종, 민족에 대한 착취의 역사가 당연하지 않다고 여겨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혁명에 공감하면서도 생도맹그 반란 노예를 진압하던 프랑스인들처럼 노예제에 의존한 경제 구조는 인식의 모순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죠.

이와 관련해 앞서 다룬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사도광산, 군함도 등 조선인을 강제징용한 일본의 전시 경제체제는 미쓰비시와 같은 전범기업들의 몸집을 키웠으며 전후 고도 경제성장의 뿌리가 됐습니다.

-이는 대항해시대와 더불어 시작된 유럽의 식민지배가 근대 자본주의의 중요한 물질적 토대가 된 것과도 비슷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광산에서 근대 이후 역사를 지우려는 일본의 꼼수는 단순히 강제동원의 역사를 감추려는 차원을 넘어 식민경제를 기반으로 고도성장을 이룬 현재 일본의 정체성을 은폐하려는 행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경제체제가 2차대전 종전 직후 남북한의 불균형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사도광산 등 일본 근대 산업유산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은 우리와도 직결된 문제라는 사실기억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참고 문헌〉
-황선익 <일본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상 쟁점과 과제> (한일관계사연구 83집, 2024년 2월)
-임채성 <동아시아 전시 전후 경제사–일본제국권 전시동원의 경험과 전후 재편> (경제사학 55호, 2013년 12월)
-송병권 <1940년대 전반 일본의 동북아지역 정치경제 인식-동아광역경제론을 중심으로> (史叢 80, 2013년 9월)
-마틴 푸크너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어크로스, 2023년)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