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영일만에서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시민편집인의 눈]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있는 ‘기후위기시계’ 전광판은 ‘5년36일’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숫자는 과학계가 ‘인류를 위한 방어선’으로 설정한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온도 1.5도 상승’까지 남은 시간을 말한다. 유엔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 등의 과학자들은 지구 온도가 이 선을 넘는 경우 극지방 빙하와 영구동토층이 걷잡을 수 없이 녹아내리고 극단적인 가뭄, 홍수, 폭염, 태풍 등 재난이 일상화할 것으로 예측했다. 일단 선을 넘으면 어떤 노력으로도 돌이키기 어려우므로, 그 전에 온실가스를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 기후과학자들은 이를 위한 첫번째 과제로 ‘화석연료를 더 이상 파내지 않는 것’을 꼽는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려면 석유 등 화석연료는 이미 개발된 것만을, 재생에너지가 충분히 확보될 때까지만 쓰고 퇴장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2015년 파리기후협정 체결 이후, 각국은 ‘그린딜’ ‘그린뉴딜’ 등의 이름으로 탄소중립 정책을 추진해왔다. 반면 한국은 말로만 그린뉴딜을 외치며 실천은 안 하는 ‘기후 악당’ 국가로 일찌감치 국제환경단체들에 찍혔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 오명을 더욱 널리 떨치게 될 것 같다. 정부가 석유와 천연가스를 새로 발굴하겠다고 나섰으니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일 기자회견을 통해 포항 영일만 일대에 국내 사용량 최대 4년치의 석유와 29년치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다고 밝혔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5배 가치’라고 덧붙였다. 많은 언론은 ‘우리도 산유국이 되는 거냐’며 반색했다. 환경단체들이 ‘화석연료 발굴은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성명을 냈지만, 들리지 않는 분위기다.
‘석유 한방울 안 나는 나라’의 설움을 겪어온 한국인이 산유국의 희망에 환호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1.5도 방어선’까지 고작 5년여를 남겨둔 기후위기 시대다. 우리의 생존과 경제적 안정을 좌우하는 것은 이제 석유·가스가 아니라 기후다. 그런데도 정부가 화석연료를 파내겠다고 나섰으니, 탄소중립 정책에는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석유·가스 발굴 가능성도 사실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싱가포르 ‘에스앤피(S&P) 글로벌 코모디티 인사이츠’의 가운 필립 반 선임분석가는 지난 10일 한국방송(KBS) 월드 라디오 인터뷰에서 아시아 석유시장의 냉소적인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영일만은) 현재 페이스2(시추를 통한 확인)가 아닌 페이스1(매장 가능성 진단)일 뿐인데, ‘매우 매우 매우 초기’인 페이스1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 발표하는 일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시추공 다섯개를 뚫는 데만 최소 5천억원이 든다는 탐사 비용은 개발에 실패하면 공중에 날리는 돈이다. 정부 기대대로 2035년쯤 상업화에 성공하더라도, 세계적인 탄소중립 흐름 속에서 ‘좌초 자산’이 될 가능성이 있다. 화석연료 퇴출 압박이 커지면서, 시추 시설이 더 이상 수익을 못 내는 골칫덩어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거기에 돈과 시간을 들이는 대신, 재생에너지 확충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지금 전남과 제주 등에서 생산한 태양광 전기 상당량이 한국전력의 시설투자 미비로 전력계통에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송배전 시설 투자가 절실하다. 알이백(RE100), 즉 ‘재생에너지 전기 100% 사용’을 충족해야 글로벌 기업과 거래를 유지할 수 있는 회사들은 필요한 재생에너지 전기를 조달하지 못해 애태운다. 정부가 지금 영일만에서 바다 밑을 파겠다고 할 때가 아니다.
임박한 위기 앞에서 정부가 엉뚱한 길을 간다면, 언론은 아니라고 외쳐야 한다. 한겨레는 이번 정부 발표의 의문점을 파고드는 등 권력 감시에 충실했으나, 기후위기와 연계한 문제 제기는 약했다. 환경단체 성명이나 시민의 걱정은 기사 끄트머리나 지면 구석에 보일락 말락 배치됐다. 무너져가는 1.5도 방어선, 재생에너지를 막는 수많은 장애물, ‘알이백’ 때문에 속 타는 기업 등을 아울러 근본적 정책 전환을 촉구하는 보도가 아쉬웠다.
기후위기 전선에서 어쩌면 우리는 이미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다. 실낱같은 희망마저 놓치지 않으려면, 기후 시민과 손잡은 언론이 정부와 정치권을 깨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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