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되살린 ‘언론 징벌적 손배제’…방송3법 동력 약화하나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규정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나서자 언론 현업단체가 “윤석열 정부의 언론탄압에 날개를 달아주는 법안”이라며 반발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징벌적 손배제 법안은 지난 21대 국회에서도 여당인 민주당 주도로 추진됐으나, 언론·표현의 자유 침해를 우려하는 언론계 안팎의 거센 반대에 부닥쳐 무산된 바 있다. 언론단체와 학계, 민주당 일각에서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및 방송·미디어 관련 기구 개편이 시급한 현시점에 징벌적 손배제 논란을 되짚는 것은 언론·미디어 개혁 법안 논의를 가로막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놓고 있다.
“악의적 왜곡보도, 손해액 3배 이내 배상”
정청래 의원은 지난달 31일 22대 국회 개원과 함께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핵심은 언론이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를 내보내 ‘타인의 인격권을 침해’했을 때, 법원이 손해액의 3배 이내에서 손해배상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정 의원은 개정안을 낸 뒤 “이 법은 가짜뉴스임을 알고도 가짜뉴스를 반복적·악의적으로 양산해내는 경우에 해당하는 국민들의 언론 피해구제법”이라며 “언론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하되, 언론의 횡포는 최대한 억제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6월8일 자신의 페이스북)
17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보면, 개정안의 제안 취지나 내용은 지난 국회에서 정 의원 등 민주당 의원들이 낸 5개의 징벌적 손배제 법안(언론중재법 개정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징벌적 손배제 도입을 제안한 이들 법안은 ‘악의적으로 인격권을 침해한 경우’, ‘비방할 목적으로 거짓·왜곡된 사실을 드러낸 경우’,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허위·조작보도’ 등에 대해 그 손해액의 3~5배 범위에서 손해배상 하도록 했다.
이들 법안이 징벌적 손해배상을 제안한 배경에는 악의적 왜곡 보도로 피해를 입더라도 언론사를 상대로는 소송에서 이기기도 어렵고 이에 따른 손해배상액도 적다는 현실이 있다. 일부 법안은 언론중재위원회의 ‘언론판결분석보고서’를 인용해 언론 관련 법원의 손해배상 인용액(원고 승소시)이 500만원 안팎에 머물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다시 말해 ‘허위·조작정보 또는 가짜뉴스’ 범람에 따른 폐해를 심각하게 여기는 국민은 점점 많아지는데, 법원의 소극적 손해배상액 산정으로 제대로 된 피해 구제가 이뤄지지 못하는 만큼 징벌적 손배제 법안의 입법 필요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언론의 책임 강화’엔 동의, 문제는 부작용
반면 언론단체와 학계에서는 잘못된 언론 보도에 따른 손해배상액을 현실화하고 정정보도를 강화하는 등 언론의 사회적 책임이 좀 더 강조돼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징벌적 손배제 도입이 가져오게 될 부작용에 대해선 경계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정치인 등 권력을 틀어쥔 쪽에서 비판적 보도를 악의적 보도로 몰아가는 등 언론 탄압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게 신중론의 핵심이다.
한국언론법학회 회장을 지낸 이승선 충남대 교수(언론정보학과)는 “징벌적 손배제가 도입될 경우 일부 언론에 대해선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법 적용 대상과 기준이 ‘악의적’ ‘비방할 목적’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 등으로 상당히 포괄적이어서 명확성의 문제가 생긴다”며 “손해배상액 현실화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징벌적 손배제로 이 문제에 대응하려는 것은 법리면에서도 실제 운용면에서도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특정 언론을 겨냥한 법안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7일 언론중재위가 낸 ‘2023년도 언론조정중재 사례집’을 보면, 언론조정사건 중 정치인이 낸 신청은 414건(18.6%)으로 개인이 신청한 사건(2225건) 중 가장 많았다. 정치인은 언론을 상대로 정정·반론 보도 및 손해배상을 가장 많이 청구하지만 정치인과 공공기관장, 고위공무원을 묶은 ‘공인’의 조정사건 피해 구제율은 62.2%로 일반인(75.7%)보다 낮았다. 정치인은 결과에 상관없이 정정·반론 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 자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는 뜻이다.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은 이런 비판을 의식해 징벌적 손배제 법안 5개를 포함한 16개의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상임위 대안을 마련할 때 정치인과 대기업 임원 등은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단서 조항을 추가했으나, 정 의원이 이번에 다시 낸 개정안에는 이 내용이 반영되지 않았다.
“더 시급한 건 방송3법 등 언론개혁 법안”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지난 국회에서 징벌적 손배제에 관한 많은 사회적 논의를 거쳐 명예훼손으로 형사처벌이 가능한 우리 법체계에서 이를 도입할 경우 이중처벌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 정치인을 비롯한 권력자의 악용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 등이 이미 모두 나왔다”며 “형법상 명예훼손죄라도 폐지하거나 아니면 전략적 봉쇄소송을 억제하는 내용을 보탠다든지 그래야 논쟁이 조금이나마 나아가는 건데, 이번 개정안은 외려 민주당이 냈던 대안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이라고 평가했다.
징벌적 손배제 논란이 자칫 더 시급하다고 평가되는 ‘방송3법’(방송법, 방송문화진흥회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 및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방통위법) 개정안의 추진 동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언론계 안팎에서 나온다.
민주당을 비롯한 7개 야당은 이달 초 윤석열 정부의 방송장악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린 뒤 7일 방송3법을 공동으로 발의했다. 여기에는 지난 국회에서 국민의힘 당 대표를 지내며 징벌적 손배제 도입에 강하게 반대했던 이준석 의원의 개혁신당도 포함돼 있다. 만약 당 지도부가 징벌적 손배제를 ‘언론개혁’의 우선순위에 놓는 순간, 개혁신당의 이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민주당 일각의 우려다.
이준형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전문위원은 “오는 8월 문화방송(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 교체를 앞두고 언론단체와 여러 야당이 공대위를 꾸려 함께 방송3법 개정을 추진하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돌연 ‘언론개혁 법안’이라며 징벌적 손배제 도입 법안을 끼워넣는 것은 옳은 전략이 아니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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