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In]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시행 1년…수익률 개선못해 도입 취지 무색

서한기 2024. 6. 18.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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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옵션에 실적배당형만 있는 다른 선진외국과 달리, 한국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 포함한 탓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도입…쥐꼬리 수익률 변화 기대 (CG) [연합뉴스TV 제공]

(서울=연합뉴스) 서한기 기자 = 정부가 물가상승률을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워할 정도로 턱없이 낮은 퇴직연금 수익률 문제를 해결하고자 도입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제도가 시행 1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디폴트옵션을 통해 유입된 퇴직연금 적립금의 대부분이 수익성이 높은 실적배당형 금융상품보다는 수익성이 낮은 원리금 보장형 금융상품에 그대로 재예치되다 보니 수익률 개선이라는 애초 도입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18일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며 퇴직연금은 운용방식과 운용 결과를 누가 책임지느냐에 따라 확정급여형(DB; Defined Benefit)과 확정기여형(DC; Defined Contribution)으로 나뉜다.

DB형은 회사가 민간 금융기관(퇴직연금 사업자)과 계약해서 퇴직연금 적립금을 운용하는 것으로, 운용책임을 회사가 진다. 운용실적에 따라 회사의 퇴직급여 지급 부담금이 달라진다.

DC형은 근로자 개인이 민간 금융기관과 개별적으로 계약해 직접 투자상품을 정하고 운용하는 등 본인이 투자 결정을 해야 한다.

디폴트옵션 통해 유입된 자금 대부분 다시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들어가

디폴트옵션은 근로자 개인이 운용책임을 지는 DC형에서 투자 상품의 만기가 도래했는데도 가입자가 별도의 운용 지시를 하지 않는 경우, 기본값·초깃값(default)이라는 단어의 뜻처럼, 6주의 대기기간이 지나면 근로자가 사전에 정해둔 운용 방법으로 민간 금융회사가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자동 운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2022년 7월 12일 도입된 뒤 1년간의 유예기간과 시범사업을 거쳐 지난해 7월 12일부터 전면 시행됐다.

DC형 퇴직연금 가입자 중 많은 사람은 자신이 가입한 금융상품에 대해 운용 지시를 하지 않는다. 실제로 1년 동안 운용 지시를 한 번도 하지 않은 가입자가 60%에 달한다는 설문 조사 결과도 있다. 운용을 지시하지 않으면 애초 가입한 대로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그대로 투자된다.

DB형뿐 아니라 DC형 퇴직연금도 원리금 보장형이 많은 주된 이유이다.

디폴트옵션을 도입한 것은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안 해도 수익성이 좋은 실적 배당형에 투자할 수 있게 미리 디폴트 상품을 정해두라는 취지다.

DC형 퇴직연금 가입자와 개인형 퇴직연금(IRP) 가입자는 반드시 디폴트옵션을 지정해야 한다. DB형 퇴직연금 가입자에게는 디폴트옵션이 적용되지 않는다.

문제는 디폴트옵션 1년의 성과가 굉장히 미흡하다는 점이다. 정부의 도입 의도와는 거의 정반대로 흘러간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디폴트옵션 제도 도입 후 만기 도래에 따라 디폴트옵션으로 들어온 전체 자금의 89%가 은행 예금이나 보험사 이율보증보험계약(GIC) 같이 원리금 보장상품에 몰린다.

겨우 나머지 10%가량의 자금만 펀드 상품 같은, 변동성이 커서 원금 손실 가능성도 있지만, 수익성은 큰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들어올 뿐이다.

애초 제도 설계 결함 탓…"가입자 정보 부족해소·규모 경제 이익 실현쪽으로 바꿔야"

그렇다 보니, 디폴트옵션 시행 후에도 수익률이 형편없다. 원리금 보장상품의 1년 수익률은 정기예금금리와 비슷한 3%대에 그친다. 실적배당형 상품의 최근 1년 수익률이 대개 10% 이상, 최고 22%에 달하는 점과 크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결국 장기적으로 안정적 수익률을 제공해 근로자들의 은퇴자금을 더욱 안전하게 보호하고 노후 소득 증대에 이바지한다는 디폴트옵션의 도입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애초 디폴트옵션 제도를 설계할 때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우리나라는 미국, 영국, 호주 등 퇴직연금이 발달한 주요 선진국에서 운영하는 디폴트옵션 제도를 본떠서 만들었다. 연평균 6~8%의 안정적 수익률을 목표로 한다. 퇴직연금의 근거가 되는 법률인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시행령에 따라 분기별로 수익률과 운용 현황이 공시된다.

그런데 우리가 모델로 삼은 이들 선진국의 디폴트옵션은 원리금보장 상품을 제외하고 모두 실적 배당형이다. 디폴트옵션의 취지가 가입자 개인이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무조건 원리금 보장형에 투자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에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디폴트옵션에는 원리금 보장형이 포함돼 있다. 그렇다 보니 정보 부족에다 투자 경험이 없는 대다수 근로자는 원리금 보장상품을 선호할 수밖에 없고, 이걸 지정하면 디폴트옵션은 유명무실해진다.

우리나라 디폴트옵션 도입과정에서 원리금 보장상품 포함 여부를 두고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민간 금융기관(퇴직연금 사업자)끼리 대립했다. 원리금 보장형을 주로 운용하는 은행은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쪽으로, 상대적으로 실적 배당형이 많은 증권사는 빼야 한다는 쪽으로 갈려 맞섰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 입법 과정 등에서 은행 쪽의 주장에 힘이 실리면서 결국 디폴트옵션에 원리금 보장형이 들어가게 됐다. 민간 금융기관의 수익은 원리금 보장형이 실적 배당형보다 크다.

고려대 행정학과 김태일 교수는 "디폴트옵션은 수익률 제고를 위해 다른 나라들이 운영하는 제도 중에서 핵심은 뺀 채 곁가지만 차용한 것으로 한계가 명확해 가입자들이 수익률이 낮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택하는 것을 막기 어려운 만큼, 가입자 정보 부족 문제를 해소하고 규모의 경제 이익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sh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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