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선 족집게 도시 “누굴 찍겠냐고? 경제 잘 할 사람”
미국 미시간주 최대 도시 디트로이트에서 북서쪽으로 차로 1시간 40분을 달리면 새기노 카운티(county·주보다 작고 시보다 큰 행정단위)가 나온다. 서울의 세 배가 넘는 면적에 인구는 20만명에 불과하다. 전형적인 ‘러스트 벨트(제조업 쇠퇴 지역)’로 평일에도 상당수 거리에서 상점이나 유동 인구를 찾기 어렵다. 이런 곳이 이번 대선 승부처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 민주당 조 바이든 대통령이 다녀간 데 이어 5월에는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까지 다녀갔다. 미시간이 대선 승부를 좌우할 경합주인 데다 이 지역 투표 결과가 지난 네 차례 대선 결과와 정확히 일치하자 유력 후보들이 앞다퉈 찾은 것이다. 새기노 주민들은 2008·2012년 대선 때는 버락 오바마(민주당) 대통령을 당선시켰고, 2016년에는 트럼프를, 2020년에는 다시 바이든을 택했다.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가는 표심 때문에 ‘부메랑 카운티’라는 별명이 붙었다. 미 전역의 카운티 3142곳 중에서 새기노처럼 직전 네 차례 대선 결과와 민심이 정확히 일치한 곳은 0.8%(25곳)에 불과하다.
새기노에서 만난 주민 대부분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한결같이 “먹고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며 “아직 누구에게 투표할지 결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모든 게 혼란스럽습니다.” 16일 오후 새기노의 최대 흑인 교회인 ‘빅토리 빌리버 교회’에서 만난 60대 여성 샌드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모든 게 엉망이다. 마트에 가서 빵과 고기 몇 개만 집어도 100달러 이상”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누가 대통령으로 와도 나아진 게 없다. 왜 여기 주민들이 선거마다 당을 바꿔 투표했겠느냐”고도 했다. 바이든은 2020년 대선에서 흑인층의 ‘몰표’를 받았다. 그러나 이날 새기노에서 만난 흑인 유권자 상당수는 “바이든이 집권해도 경제 상황이 나아진 게 없고, 오히려 나빠졌다”고 했다.
이 교회 신자 샘 토머스(52)씨는 “트럼프는 그나마 경제는 좀 더 잘한다고 평가받지 않느냐”면서도 “그렇다고 트럼프를 찍겠다고 하면 주위에서 욕먹는다. 침묵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상당수 미국인은 자신의 정치 성향을 자유롭게 밝히고 토론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새기노 유권자들 대부분은 이날 “누구를 뽑을지 묻지 말라”고 했다.
섀기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곳이다. 미 인구통계 조사(지난 2022년 기준)에 따르면, 빈곤율은 16.5%로 미국 평균보다 3.7%포인트 높다. 비교적 부유한 백인 교외 가정을 제외한 도심으로만 한정하면 빈곤율은 21.8%까지 치솟아 미 전역 도심 중 12번째로 가난하다. 흑인 빈곤율이 35.83%, 히스패닉 빈곤율이 30.22%로 백인들과의 빈부 격차가 큰 편이다. 곳곳엔 녹슨 폐공장·건물들이 줄지어 선 풍경이 이 지역의 형편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주요 선거 때마다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인 유색인종들이 결집하며 ‘민주당 텃밭’으로 분류돼 왔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하는 이변이 일어났지만 4년 뒤에는 다시 바이든을 선택했다.
그러나 재선에 도전하는 바이든에 대한 새기노 주민들의 신뢰는 흔들리고 있었다. 도심에서 펍을 운영하고 있는 30대 라울 바라디는 “몇 달 만에 식당 운영에 필요한 식료품 비용이 4분의 1이 올랐다”며 한숨을 쉬었다. 10년간 육군에서 복무한 그는 ‘누구에게 투표할 것이냐’는 질문에 “군인은 정치색을 밝히지 말라고 배워왔다”며 “다만 이번엔 경제를 조금이라도 낫게 할 사람을 뽑는 게 맞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우리는 그저 일 잘하는 사람을 원할 뿐”이라며 “여기 주민들은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다”고도 했다. 맥주를 마시면서 그의 말을 듣던 손님이 “트럼프나 바이든이 이곳에서 유세한 줄도 몰랐다”며 “중요한 건 ‘치고 빠지기식(hit and run)’ 방문이 아니라 경제 상황을 낫게 만드는 것”이라고 거들었다.
민주당 지지세가 강했던 유색인종이 현 정부에 갖는 불만이 거세지자 트럼프는 공격적으로 이들의 표심 잡기에 나서고 있다. 지난 3월 새기노를 방문한 트럼프는 15일에는 디트로이트의 흑인 교회를 찾아 지역사회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꾸렸다. 트럼프는 이 자리에서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 진영을 겨냥해 “그들이 이곳으로 침투해 당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내쫓아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흑인 교회 방문은 앞서 미시간을 찾은 바이든이 흑인 교회를 방문하지 않아 지지층의 비판을 받은 점을 겨냥한 행보로 풀이된다.
유색인종 투표층에서 바이든의 고전과 트럼프의 선전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USA투데이와 서퍽대가 지난 9∼13일 경합주 두 곳의 흑인 유권자 각 500명을 대상으로 발표한 조사에서 바이든은 펜실베이니아에서 56.2%, 미시간에서 54.4%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트럼프보다 각각 45.4%포인트, 39.2%포인트 앞섰지만, 지난 2020년 대선 당시 바이든의 지지율보다는 20∼22%포인트 하락한 수치다. 바이든에게서 이탈한 흑인 등 유색인종 표심이 트럼프에게 지속적으로 쏠릴 경우 미세한 표 차로 갈리는 경합주 승부에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다만 트럼프에 대한 유색인종 지지세 증가가 표로 직결될지는 회의적 시각도 있다. 새기노 도심에서 가판을 세워놓고 의류를 판매하는 디안드레 그린(23)씨는 “그렇다고 국경 장벽을 세우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일삼았던 트럼프를 어떻게 뽑겠느냐”며 “그래도 흑인들은 막판엔 바이든으로 쏠리기 마련”이라고 했다. 반면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라틴계 40대 남성은 “트럼프가 훨씬 경제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민주주의보다 중요한 게 가족 부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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