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없는 한글학교 품어 준 韓입양아 출신 프랑스 교장

파리/정철환 특파원 2024. 6. 18.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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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프랑스 대사, 필리트 교장에게 꽃다발 건네며 감사 인사 전해
마갈리 필리트(정혜경) 교장 선생님과 최재철 주프랑스 한국 대사. /리움한글학교 제공

프랑스 동남부의 중심 도시이자, 파리와 마르세유 다음으로 큰 도시인 리옹. 지난 15일 이곳의 한글학교 ‘리움(Lium)’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최재철 주(駐)프랑스 한국 대사가 학교 운영 현황을 살펴보러 파리에서 400여㎞를 달려온 것이다. 보통은 교육부 소속 한국교육원이 하는 일이지만 이날만은 대사가 직접 나섰다. 여느 한글학교와는 다른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다.

리움 한글학교는 리옹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공립 미슐레(Michelet) 초등학교 건물에 둥지를 틀고 있다. 프랑스 내 한글학교 중 유일하게 프랑스 교육 당국의 시설 지원을 받는다. 공립학교 건물을 쓰는 덕분에 임차료도 거의 내지 않는다. 다른 한글학교들이 민간 시설(사립학교나 일반 건물)에서 운영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런 ‘특별 대우’는 미슐레 초등학교 교장 마갈리 필리트(57)씨 덕분. 그가 프랑스 교육 당국에서 이례적 시설 사용 허가를 받아냈다.

필리트씨의 한국 이름은 정혜경. 1967년 서울 서초동에서 태어난 프랑스 입양아 출신이다. 8세 때 리옹 인근 ‘생시르 오 몽도르’란 마을로 와서 새 부모와 인연을 맺었다. 여느 입양아들처럼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주변의 차별적 시선 등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꿋꿋하게 성장, 1995년 자신의 꿈이었던 초등학교 선생님이 됐다. 이후 프랑스 교육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해 2016년부터 이 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리움 한글학교를 위한 장소 지원에 나선 것은 2022년 초부터다. 리움 한글학교 운영협회 대표 이의형(49)씨는 “학부모들의 십시일반으로 어렵사리 문을 열었지만, 갈 곳이 마땅찮아 영어 학원 건물에서 더부살이하던 우리 학교를 필리트 선생님이 선뜻 품어줬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학생 10여 명으로 시작한 리움 한글학교에선 지금 어린이·청소년 30여 명, 성인 20여 명 등 총 50여 명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이 중엔 리옹과 그 인근에 살고 있는 입양아 출신도 적지 않다.

필리트씨는 “내 조국(祖國)인 한국에 대한 사랑 때문에 (리움의 딱한 사정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며 “우리 동포들이 제대로 된 한글 교육을 받아 모국 문화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 사명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내가 프랑스 아이들에게 프랑스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는 곳에서 한국어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면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요. 가끔 학교에서 ‘한국 주간’을 열기도 해요. 프랑스 학생들이 K팝을 부르고, 한국어 글짓기를 하고, 한국 요리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그는 자신이 입양된 사연과 그 후 있었던 일들에 대해선 상세히 밝히지 않았다. 그저 “(자라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은 잊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놓지 않았다. 1988년 리옹 3대학에 개설된 한국어학과에 등록해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그 인연으로 부모님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한국 국적도 회복해 이중국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 내 한국 출신 입양아 가운데 이중국적이 인정된 이는 그가 처음이라고 한다.

최재철 대사는 이날 필리트씨에게 직접 꽃다발을 건네며 감사를 표했다. 그는 “프랑스 곳곳에 있는 우리의 핏줄들이 고국을 잊지 않고, 동포를 위해 힘써 주는 것에 대해 항상 고맙고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또 “프랑스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는 만큼, 한국어 교육 수요가 원만하게 충족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다.

리움 한글학교는 80여 명의 학부모와 후원자들이 결성한 운영협회가 운영한다. 교사 채용과 재정 운영, 교육과정 등이 프랑스 현지 규정에 맞춰 투명하게 이뤄지는 게 자랑이다. 협회 측은 “일부 한글학교가 불투명한 교사 채용과 예산 집행, 운영자의 독단·권위적 운영으로 학부모의 불만을 산 것을 반면교사로 삼았다”고 했다. 그러나 ‘재외 교육기관’ 등록이 3년째 지연되면서 한국 정부 예산으로 한글학교에 제공하는 교재 및 운영비 지원을 못 받고 있다. 실무를 담당한 주프랑스 한국교육원 관계자는 이와 관련 “다른 한글학교 한 곳이 이 학교의 등록에 계속 반대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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