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당의 몰락… “이 난국에 환경이 문제냐”
이달 초 끝난 유럽의회 선거에서 환경 정책을 최우선시해온 녹색당이 대거 의석을 잃으면서 반세기 만에 유럽의 주요 정치 세력으로 입지를 굳혔던 녹색당이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녹색당은 주요 국가에서 반(反)난민 정서와 민족주의를 외친 극우 세력에 밀리는 모습을 보였고, 전통적인 지지층이었던 젊은 층에게도 외면을 받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녹색당이 주도해온 유럽의 강력한 친환경 정책에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번 유럽의회선거에서 각국의 녹색당과 진보 성향 정당들이 연대해 꾸린 정치 그룹인 녹색당-유럽자유동맹은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기존 71석에서 19석이나 의석수를 잃은 52석에 그쳤다. 강경 우파 정치 그룹인 유럽보수와 개혁(ECR·76석), 극우 성향의 정체성과 민주주의(ID·58석)에 밀리면서 원내 6당으로 떨어졌다. 직전 2019년 선거에서 역대 최다 의석수를 얻으면서 최대 승자로 주목받았기 때문에 이번 패배가 더욱 뼈아프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녹색당 유럽의회 선거의 참패를 조명한 ‘녹색당은 죽었다’ 제하의 기사에서 “최근 몇 년간 기후변화와의 싸움에서 최전선에 있던 녹색당이 의석수의 3분의 1 가까이를 잃으면서 쫄딱 망했다(tanked)”고 했다. 인구 비율에 따라 의석수를 할당하는 유럽의회에서 녹색당은 주요국에서 한 자릿수 의석에 그쳤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이 소속된 ID가 30석을 쓸어담아간 프랑스에서 녹색당은 극좌 세력 ‘더 레프트’보다도 적은 5석에 그쳤고, 역시 강경 우파 집권당이 참여한 ECR이 24석을 얻은 이탈리아에서는 고작 3석을 얻었다. 유럽 최대 인구·경제 대국으로 유럽의회 내 의석수가 가장 많은(96석) 독일에서는 16석을 얻어 그나마 선방한 것으로 보이지만 속사정을 보면 그렇지 않다. 현재 독일 연방의회 원내 3당으로 중도 좌파 사민당, 중도 자민당과 이른바 신호등 연정을 이루고 있는 녹색당의 위상에 비춰보면 실망스러운 성적이다. 특히 극우 정치 노선을 표방하며 독일 정치권의 집중 견제를 받고 있는 독일을 위한 대안(AfD)에조차 1석이 뒤졌다. 이 때문에 독일 정치권에서는 조기 총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연정이 무너져 집권당 지위를 잃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고속 경제 성장에 따른 환경 오염 등의 폐해가 잇따르던 1970년대 초반 유럽과 북미 각국에서 환경운동가들이 녹색당이라는 이름으로 생태·환경주의 정치 단체를 만든 것이 오늘날 녹색당의 시초다. 이들의 주장이 사회적 호응을 얻으면서 1980년대부터 유럽 각국에선 녹색당의 원내 진입과 내각 각료 배출이 잇따르면서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요슈카 피셔(전 독일 부총리), 아날레나 베어보크(현 독일 외무장관), 페르 볼룬드(전 스웨덴 부총리)등 유력 정치인들도 배출했다.
이런 녹색당이 유럽의회 선거에서 참패한 원인을 두고, 우선 전쟁 위기와 경제난 등 당면한 현안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민심을 잃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NYT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 각국에서 국방과 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코로나와 인플레이션으로 생활비 위기가 지속되고 있으며, 이민 억제가 유권자의 주요 관심사가 됐다”며 “중도 정당들이 기후 정책을 흡수하는 사이 녹색당의 매력은 희미해졌고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일부 환경 단체들의 과격한 행태에 대한 반발 정서도 녹색당에 타격을 입혔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2019년 당시 16세 나이로 타임지 최연소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작년 모국 스웨덴에서 경찰 불복종 혐의로 벌금형을 받은 데 이어 올 4월 네덜란드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체포되는 등 최근 유럽 각국에서는 환경운동가들의 과격한 시위로 인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플레와 구직난 등 먹고사는 문제로 고생하고 있는 청년층을 공략하지 못한 것도 녹색당 고전의 원인으로 꼽힌다. 독일 공영방송 ZDF 등은 특히 독일 극우 정당 AfD가 이번 유럽의회선거에서 약진한 배경에는 녹색당의 전통적 지지층이었던 젊은이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함부크르크대 정치학자 제시카 하크는 영국 가디언에 “이전 선거에서는 대부분의 EU 국가에서 환경 문제가 정치적 의제의 최전선이었지만 경제 위기에 대한 우려가 녹색당 투표율 하락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로이터가 유럽의회 유권자가 가장 많은 5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폴란드) 국민 6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장 중요한 선거 의제는 ‘경제 개선과 인플레이션 감소’였다. 2위는 외교 갈등과 전쟁, 3위는 이민자 문제였고 기후변화는 5위였다.
유럽의 녹색당은 EU의 친환경 정책을 주도하면서 기후 문제 해결을 선도해온 정당이다. 이 때문에 녹색당의 쇠퇴가 그동안 EU가 주도해온 강력한 친환경 정책에 변화가 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로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유럽의회 내에선 환경 정책 후퇴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폴리티코는 EU의회 내 최대 정치 그룹인 중도 우파 유럽국민당 고위 관계자들이 203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신차 판매를 금지하기로 한 기존 정책의 재검토를 거론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유럽국민당의 만프레드 베버 대표가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 금지 정책은 실수”라며 2035년까지 판매를 중단하는 목표 수정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거론했다는 것이다.
-
🌎조선일보 국제부가 픽한 글로벌 이슈!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39
🌎국제퀴즈 풀고 선물도 받으세요! ☞ https://www.chosun.com/members-event/?mec=n_quiz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尹, 예산 시정연설도 불참하나...정진석 “현재로선 총리가 할 듯”
- 中, 8일부터 한국인 관광객에 최대 15일 무비자 입국 허용
- 대전 다가구 주택서 화재…1명 숨지는 등 인명 피해
- 천하람 “이러니 지지율 19%” 정진석 “그 당 지지율이나 신경쓰라”
- 미국 10월 신규 일자리 1만2000개 그쳐... 허리케인이 노동시장 강타
- 라브로프 러 장관, 우크라 전쟁 이후 첫 EU 방문
- “부친 산소에 휴대폰 묻었다”던 명태균…검찰엔 “부친 화장했다”
- 울산HD, '홍명보 논란' 딛고 K리그1 3연패 달성
- “전기차 선두는 오직 테슬라?...중국이 판 뒤집을 가능성 커”
- 한동훈, 명태균 녹취에 침묵... 친한계 “뭘 알아야 대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