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기증 때처럼… 조용히 떠난 ‘기부왕’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게 됐습니다. 손 아무개 기증이라고 붙여 주세요.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손세기·손창근 컬렉션 기증식에서 단상에 오른 손창근씨가 말했다. ‘조용한 문화유산 기부왕’으로 알려진 그가 유일하게 사람들 앞에 서서 한 말이었다. 사업가이자 문화유산 애호가 손창근(95)씨가 지난 11일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유지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렀다고 한다. 그는 부친 손세기씨로부터 물려 받은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이자 국보인 ‘세한도’를 나라에 기증한 것으로 유명하다.
손창근씨는 1929년 개성에서 태어나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개성의 부호였던 부친 손세기씨와 함께 광산업 등 사업을 했다. 2012년 경기도 용인의 임야 200만평을 국가에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2017년 KAIST에 50억원 상당의 건물과 1억원을 기부했고, 2018년 ‘용비어천가’ 초간본과 추사의 걸작 ‘불이선란도’ 등 문화유산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2020년엔 사실상 마지막 소장품인 ‘세한도’도 기증했다.
‘세한도’는 추사가 유배 시절인 1844년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준 그림으로, 180년 동안 10명의 주인을 거쳤다.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과 그 아들 김준학을 거쳐 권세가 민영휘와 그 아들 민규식의 소유가 됐다. 1926년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한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흠모해 많은 자료와 함께 ‘세한도’를 사들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1944년 수집가 손재형이 후지쓰카를 찾아 100일 동안 문안하며 ‘세한도’를 달라고 청하자 “그대 나라의 물건이고 나보다 그대가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며 돈 한 푼 받지 않고 내줬다. 돌아온 ‘세한도’는 이후 손재형이 정치에 나서면서 이근태에게 저당잡혔고, 개성 갑부 손세기 소유가 된 것을 아들 손창근씨가 물려받았다.
손창근씨가 구순을 맞아 컬렉션을 모두 기증하면서도 “이것 하나만은 섭섭해서 안 되겠다”며 빼놓은 작품이 ‘세한도’였으나 끝내 마지막 한 작품까지 내놓게 됐던 것이다. 2020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을 때 자녀 손장규·손영심·손성규씨를 대신 보냈고, 영상으로 보낸 메시지에선 딱 한마디만 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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