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퍼트에서 엇갈린 운명… 디섐보 정상 포효
마지막 18번홀(파4)을 앞두고 6언더파 동률. 앞 조에서 경기하던 로리 매킬로이(35·북아일랜드)가 18번홀 1.14m 파 퍼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16번홀(파4)에서 76㎝ 파 퍼트를 놓쳐 보기를 기록하면서 브라이슨 디섐보(31·미국)와 동타로 내려앉았던 매킬로이. 올 시즌 91㎝(3피트) 이내 퍼트를 496번 시도해 모두 성공시켰던 그로선 뼈아픈 보기였다. 18번홀 파 퍼트는 그보다 약간 멀었지만 넣어야 하고 넣을 수 있었던 거리. 그런데 이번에도 공이 홀컵을 스치듯 나오면서 또다시 보기. 최종 합계 5언더파 275타로 떨어졌다.
이젠 디섐보 차례. 18번홀 티샷이 빗나갔다. 나무 아래서 간신히 세컨드샷을 했다. 그런데 벙커에 빠졌다. 연장전으로 갈 듯한 분위기. 여기서 디섐보는 벙커샷을 홀 1.19m까지 붙였다.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샷도 해내는 걸 본 적 있다”는 캐디 말에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어진 파 퍼트. 침착하게 퍼트를 한 디섐보는 공이 홀컵으로 들어가자 두 팔을 흔들며 포효했다. 그는 “그 벙커샷이 인생샷이었다”고 했다.
디섐보가 1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 리조트 앤드 컨트리클럽 2번 코스(파70·7537야드)에서 열린 US오픈(총상금 2150만달러) 4라운드에서 마지막 홀까지 가는 접전을 승리로 이끌며 4년 만에 다시 이 대회 정상에 올랐다. 최종 합계 6언더파 274타. 우승 상금은 430만달러(약 60억원)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통산 아홉 번째 우승이다. 2022년 이적한 LIV에선 지난해 2승을 거뒀다.
디섐보는 이날 4라운드를 3타 차 단독 선두로 출발했다. 그러나 공동 2위로 출발한 매킬로이가 9번홀(파3)부터 13번홀(파4)까지 버디 4개를 잡아내며 한때 2타 차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매킬로이로선 2014년 PGA챔피언십 이후 10년 만에 다시 메이저 대회 우승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15번홀(파3)부터 18번홀 사이 보기 3개를 기록해 스스로 무너졌다. 최근 10년간 네 번째이자 3년 연속 메이저 준우승이란 불운을 곱씹어야 했다.
이날 매킬로이를 꺾은 디섐보는 전보다 날렵해진 모습이었다. 그는 체중이 80kg대였던 2018년까지 투어 5승을 올렸다. 이후 2019년 말부터 근육을 불려 몇 달 만에 체중 110kg 넘는 거구로 거듭났다. 400야드 넘나드는 압도적 장타를 휘둘러 ‘헐크’란 별명도 얻었다. 그 몸으로 2020년 메이저 첫 우승(US오픈)을 포함해 2020~2021년 투어 3승을 추가했다. “디섐보가 골프 경기 방식을 통째로 바꿔놨다”며 당시 골프계는 충격에 빠졌다.
그러던 지난해 그는 “살을 빼고 있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손목 수술을 받는 등 부상에 시달렸고 소화기관이 엉망이 됐다고 했다. 체중 90㎏ 안팎으로 날렵해졌지만 여전히 이번 대회 출전 선수 중 최장타(337.9야드)를 자랑했다. ‘살 뺀 헐크’라는 새 별명도 생겼다. 이날 경기 시작 20분을 앞두고 급하게 드라이버 헤드를 교체하는 바람에 페어웨이 안착률이 36%에 그쳤으나, 쇼트게임 실력을 바탕으로 헤쳐나갔다.
끊임없이 튀는 언행 때문에 과거엔 야유와 비난도 받았으나, 이날은 “U-S-A”를 연호하는 관중 응원과 환호를 등에 업었다. 골프 팬들도 LIV로 떠난 ‘괴짜’ 디섐보가 그리웠던 것이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수학·물리학 지식을 골프에 활용해 ‘미친 과학자’로 통했다. 길이가 모두 같은 아이언을 쓰고, 아예 아이언을 3D 프린터로 제작하는 등 남다른 시도는 여전하다. 골프공을 사용하기 전엔 엡솜 염(Epsom salt)을 섞은 물에 띄워보기도 한다. 제조 과정 오류로 중심 균형이 정확하게 맞지 않는 공을 걸러내는 테스트라고 했다.
디섐보는 2022년 LIV로 이적했고 아버지를 잃었다. 부상 이후 슬럼프에 빠지는 등 시련을 겪으면서 “골프 말고도 삶에 많은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팀을 이뤄 단체전을 벌이는 LIV에서 같은 팀 선수들과 소통하며 큰 힘을 얻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주변 사람들이 계속 밀어줬다”고 했다.
디섐보에게 우승을 내주고 US오픈에서 2년 연속 1타 차 2위에 머문 매킬로이는 또 한 번 우승 문턱까지 갔다가 충격적 패배를 경험했다. 매킬로이는 메이저 4승을 포함해 PGA 투어 통산 26승을 올렸지만, 메이저 대회 최종 라운드에서 치명적 실수를 저질러 다 잡은 우승을 놓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날 낙담한 그는 언론 응대를 거부한 채 곧바로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한국 선수 중에서는 김주형(22)이 공동 26위(6오버파), 김시우(29)가 공동 32위(7오버파)로 마쳤다. 세계 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28·미국)는 공동 41위(8오버파)에 그쳤다. 이날 발표된 세계 랭킹 기준으로 다음 달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남자 골프 선수는 세계 26위 김주형과 27위 안병훈(33)으로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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