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징역 100년’ 우리는 왜 안 되나 [에스프레소 이동수]
美의 권도형 벌금 6조 보며 우리 정치도 국민 분노 헤아리길
“미국이니까 벌금으로 그 돈이라도 받지. 이 나라는….”
가상 화폐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주범인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 측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약 6조4200억원(46억7800만달러) 규모의 환수금 및 벌금 납부에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주, 한 고교 동창은 대화 내내 허탈한 웃음만 지었다. 그 역시 ‘테라‧루나’ 사태의 피해자였다. 그는 권도형이 합의를 봤더라도 미국으로 송환되길 바란다. 우리나라로 와봤자 제대로 처벌받지 않을 게 뻔하니 미국에서 재판받도록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다. “사기꾼들에게 한국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일 것 같다”라는 농담에선 입법부와 사법부를 향한 불신이 묻어났다.
인천 ‘건축왕’ 사건의 피고인인 남모씨는 올해 초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미추홀구 일대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 전세 사기 사건은 피해액 148억여 원, 인정된 피해자만 191명에 달할 만큼 중대한 사건이었지만 재판부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 형량은 고작 15년이었다. 오죽하면 당시 재판관이 “현행법은 악질적인 사기 범죄를 예방하는 데 부족하다”라며 형량 강화 필요성을 역설할 정도였다.
크게 한탕 해 먹어도 처벌은 솜방망이이니 사기가 끊이지 않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고(故) 게리 베커 시카고대 교수는 “범죄로 얻게 될 기대 이익이 지불해야 할 기대 비용보다 클 때 발생하는 범죄 행위는 ‘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 걸려서 처벌받더라도 남는 게 있으면 범죄를 저지를 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청담동 주식 부자’로 유명했던 이희진은 2016년 수백억 원대 불법 투자 유치 및 사기로 구속됐지만 징역은 겨우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만기 출소한 직후 또다시 ‘깡통 코인’을 발행해 투자자들의 돈 900억원가량을 가로챘다. 누군가 댓글에 이렇게 남겼다. “이 정도면 판사가 재범을 권장한 것”이라고.
우리나라는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개의 범죄를 저질러도 가장 무거운 죄에 내려질 수 있는 형량에 2분의 1을 가중하는 가중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두세 명에게 사기를 치나 백 명에게 사기를 치나 형량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 병과주의를 채택한 미국은 각각의 죄에 대한 형량을 모두 합산해 처벌한다. 이따금 대규모 금융 사기나 총기 난사를 저지른 이들에게 100년 이상의 징역형이 선고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이러니 권도형이나 손정우(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운영자) 같은 ‘글로벌’한 범죄자들이 기를 쓰고 한국에서 재판받으려 한다.
사실 우리도 과거 박근혜 정부 시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일부 범죄에 대해 병과주의를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국내 법체계에 부합하지 않는다’든가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일면서 유야무야 넘어갔다. 강력한 처벌이 능사는 아니라고 하지만, 오늘날의 형벌은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에서 봤을 때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죄에 비해 터무니없이 가벼운 형량, 범죄 수익에 한참 못 미치는 벌금, 그마저도 며칠 노역으로 때우는 ‘황제 노역’까지. 처벌이 시원치 않으니 사적 제재도 들끓는다.
일부 법률과 국민의 법 감정 사이 괴리는 예전부터 숱하게 제기돼 온 문제다. 하지만 누구 하나 국민의 가려운 등을 시원하게 긁어준 정치인은 없었던 것 같다. 그게 오늘날의 정치 혐오와 사법 불신으로 이어졌다. 상대가 검찰 개혁이니 판사 선출이니 하는, 민생과 무관한 정쟁에 매몰돼 있을 때 정부 여당이 이 부분만 제대로 노렸어도 국민의 호응을 제법 얻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통령에게서도 국민의힘에서도 그런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민생이란 건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 분노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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