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이야기로 배우는 쉬운 경제]자유로운 시장경제에는 보이지 않는 규범 있어요

이철욱 광양고 교사 2024. 6. 17.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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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하며 성장하는 ‘시장경제’에선
혁신 기업이 추가 이익 획득 가능
촘촘한 규범 정해 균형-질서 유지
공급-수요 짝 지어주는 ‘계획경제’… 새로운 상품-기술 나오는 데 한계

제가 근무하는 서울 광진구 광양고는 융합인재반에서 매년 학생을 모집합니다. 정원은 30명인데 올해는 80명 넘게 지원해 논술 시험을 치렀습니다. 최근 인공지능(AI) 열풍을 반영해 ‘가위바위보 놀이’를 정의하고 설명하라는 문제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위바위보 중 가장 정의 내리기 어려운 건 가위가 아닐까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어떤 친구들은 네 번째 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내밀고 가위라고 우겼습니다. “이게 가위냐”라는 논쟁 끝에 가위의 두 칼날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결국 인정했습니다. 다만, 손가락 두 개를 편다고 모두 가위는 아니고 두 손가락이 바로 인접해 있어야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시장경제와 규범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규범은 법처럼 문서화된 것도 있고, 윤리 도덕 예절처럼 문서는 아니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문화로 존재하는 것도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가위바위보에도 나름대로 엄격한 규칙이 있고, 변칙이 등장하면 논쟁으로 풀어 나갑니다. 규범이 있기 때문에 가위바위보는 싸움이 아니라 게임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경제 수준의 문제를 하나 내 볼까요.

여기는 생수 시장입니다. 생수를 사려는 구매자는 갑, 을, 병 이렇게 3명입니다. 각각 한 병씩만 사고자 합니다. 갑은 최대 3000원, 을은 최대 2000원, 병은 최대 1000원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생수를 팔려는 공급자는 A, B, C 이렇게 3명입니다. 이들도 각각 1병씩만 팔고자 합니다. A는 최소 1000원, B는 최소 2000원, C는 최소 3000원은 받을 생각입니다. 이 6명이 모여 거래를 한다면 생수 가격은 얼마에 형성되고, 몇 개가 거래될까요.

정답은 2000원에 2개입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격이 1000원이면 이에 응하는 수요자는 갑, 을, 병 3명이고 공급자는 A 1명이므로 초과 수요가 발생해 가격이 오른다. 가격이 3000원이면 이에 응하는 수요자는 갑뿐이고 공급자는 A, B, C 3명이므로 초과 공급이 발생해 가격이 내려간다. 가격이 2000원이면 이에 응하는 수요자는 갑, 을 2명이고 공급자는 A, B 2명이므로 초과 수요도 초과 공급도 없는 균형에 도달한다.”

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갑과 C, 을과 B, 병과 A가 거래하면 모두 손해를 안 보고 거래량도 3개로 최대가 될 수 있는데 이건 왜 안 되나요?”

생수를 못 산 병, 팔지 못한 C가 안쓰럽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가격을 통일할 필요가 없다면 거래량을 2개에서 3개로 늘릴 수 있습니다. 다만 누군가 적당한 공급자와 수요자를 짝 지어줘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경제에 적용한 것이 ‘계획 경제’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사회주의 계획 경제 초기에는 생산 능력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넘어섰습니다. 병이나 C처럼 거래를 못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계획경제하에선 점차 누구도 갑이나 A와 같은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게 되는 겁니다. 갑은 새로운 상품, 신기술 제품 등을 적극적으로 구매해 신생 기업이 성장할 수 있게 해주는 소비자입니다. A는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는 기술 혁신 기업입니다.

반면 시장경제는 갑과 A에게 이익을 줍니다. 갑은 3000원에라도 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2000원에 구매하게 되니 1000원의 추가 이익을 얻습니다. A는 1000원만 받아도 되는데 2000원을 받게 되니 1000원의 추가 이익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추가 이익을 ‘잉여’라고 부릅니다. 시장경제에선 잉여가 많이 발생합니다.

1990년대 초 러시아는 체제 경쟁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시장경제로 체제 전환을 시도합니다. 전격적인 사유화 조치를 단행했지만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아마 경제에 자유를 보장하면 저절로 될 거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의 비유를 인용하면 ‘벽에다 수도꼭지를 설치하고 틀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착각입니다. 시장경제는 자유로 가득 찬 것 같지만 실제는 표준화와 규칙 같은 규범들로 가득합니다. 규범이 있기 때문에 경쟁이 가능하고 질서가 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철욱 광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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