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시민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류애 가져야” [차 한잔 나누며]

정지혜 2024. 6. 17.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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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시민에 대한 한 가지 정의는 없어요. 핵심은 언어, 역사, 정치, 경제, 종교를 다 떠나서 작동하는 인류애, 공동 운명체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죠."

전 세계의 교육, 과학, 문화 보급과 교류를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 유네스코에서 23년을 근무한 최수향 박사는 세계 시민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것이 흔히 국제기구를 꿈꾸는 이들의 이상이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불편함을 의식할 필요도 있다는 게 최 박사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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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첫 女 유네스코 본부 국장’ 최수향 박사
“내가 타국에 미칠 영향 떠올려
‘글로컬’한 태도 지니는 것 필요”
20여년 근무 경험 담은 책 출간
“도서 판매 수익 모두 기부할 것”

“세계 시민에 대한 한 가지 정의는 없어요. 핵심은 언어, 역사, 정치, 경제, 종교를 다 떠나서 작동하는 인류애, 공동 운명체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죠.”

전 세계의 교육, 과학, 문화 보급과 교류를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 유네스코에서 23년을 근무한 최수향 박사는 세계 시민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여러 나라를 여행하거나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건 세계 시민의 요건이 아니다. 

유네스코에서 은퇴한 뒤 반려동물, 예술 활동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최수향 박사가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국제기구 직원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세계 시민이라는 건 경험보다는 정신과 행동의 문제”라고 한 최 박사는 “외국에 가지 않더라도 내가 타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생각은 세계적(global)으로 하되 행동은 내 집 앞에서부터(local) 하는 ‘글로컬’한 태도”를 강조했다.

20여년 국제기구에서의 치열한 삶을 돌아본 책 ‘나의 글로벌 직장 일기’를 펴낸 최 박사를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2022년 1월 은퇴 후 약 2년 만에 나온 책에는 ‘유네스코 본부 국장에 오른 최초의 한국 여성’이란 수식어 뒤 화려할 수만은 없는 국제기구 직원의 현실과 고뇌가 담겼다. 

◆국제기구 직원에게 필요한 의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것이 흔히 국제기구를 꿈꾸는 이들의 이상이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불편함을 의식할 필요도 있다는 게 최 박사의 생각이다. 

유네스코에서 은퇴한 뒤 반려동물, 예술 활동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최수향 박사가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국제기구 직원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경우 “국제기구 직원의 삶에 쳐진 보호막 안에서 도덕적으로 느끼는 괴리감”에 괴로움이 컸다. 최 박사는 “내가 정말 저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건지 아니면 그걸 명목으로 내가 편안히 사는 건지 계속해서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 박사에 따르면 현지 사회에 밀착해서 도움을 주는 비영리기구(NGO)나 자원봉사자들도 기회가 되면 국제기구 같은 더 큰 조직으로 오려고 한다. 직장으로서 국제기구의 혜택이 크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어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하면서 내가 편히 사는 것에 대한 상당한 불편함이 있었어요. 그것을 알고 들어가야만 내 행동에 조금이라도 조심하고 함부로 하지 않는 의식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가 은퇴하기 직전인 2021년 아프가니스탄이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테러단체 탈레반의 손에 들어갔을 때는 “지금껏 해 온 일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했다. 최 박사는 “여성 권리 문제도 그렇고 수많은 국제기구가 한 사회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는데, 정치적 격변으로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시계가 거꾸로 가는 사례를 보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국제기구 고위급 직원의 한마디에 부여되는 권위, 넓은 세상을 무대로 매순간 배움의 기회로 가득찬 일터를 갖는다는 것은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장점이자 특권이다.

국제기구의 일은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개발(development)과 재해·재난 때 투입되는 원조(humanitarian work) 사업으로 크게 나뉜다. 이 중 원조의 경우 홍수나 전쟁 중인 곳에 가서 식량 지원 등을 하는 일이라 보람을 좀 더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최 박사는 전했다.

◆어떤 사람이 국제기구에 적합할까

최 박사가 책을 쓴 것은 청년들에게 “삶에는 ‘우연의 여신’이 있음을 알려주고, 지그재그 길이라도 얼마든지 괜찮다. 한 발 뒤로 가더라도 두 발 앞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20대 때 해외에서 공부하며 박사 학위를 받은 그 역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던 시절이 있었다. 유학을 마치고 유네스코에 들어가기까지 7년이 걸렸다. 그 사이 한국에서 교육개발원에 첫 직장을 잡기도 했지만 한국과 캐나다를 왔다 갔다 하며 불확실한 운명에 종종 불안해하던 시간이었다.

결국 국제기구에 정착한 최 박사는 자신의 한국 직장에서의 경험을 돌이켜보며 “한국 사회가 관계지향적(relationship-oriented) 사람에게 유리한 면이 있다면 국제기구는 업무지향적(task-oriented) 사람에게 보다 더 적합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교육개발원에서 일할 때 관리들을 대하는 자세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자신을 상사들이 힘들어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한국 사회에서 어딜가나 출신 대학을 묻고 명문대를 따지는 문화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반면 국제기구에서는 “거기도 권력 관계가 있고, 힘 있는 나라 출신이 있지만 의식적으로 누르려는 조직의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 표현하는 건 금기시된다”며 “일하는 내내 데리고 있는 직원들의 대학교를 물어본 적도 없고, 그냥 한 사람의 개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게 참 좋았다”고 말했다.

책에서 ‘결혼보다 경제적 독립’을 강조하기도 했던 최 박사는 비혼 여성 선배로서 후배 여성 청년들에게 뼈 있는 조언을 남기기도 했다. 

“직업이라는 것을 진짜 나 스스로를 먹고 살리는 일이라는 절박한 의식 하에서 가졌으면 해요. 아직은 문화적으로 여성이 경제적 자립권에 대해 남성만큼 긴박감이 없는 것 같거든요. 밥벌이라는 게 얼마나 죽고 살 일인지, 내 능력으로 나를 책임져야한다는 의식이 더 확고하면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목숨 걸고 덤비지 않을까 싶어요.”

최 박사는 은퇴 후 여유로워진 일상 상당 부분을 반려견 디디와 함께 보내는 데에 쓰고 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며 잦은 출장과 바쁜 업무 등으로 디디를 기다리게 했던 시간이 많았기에 남은 시간이나마 그것을 보상하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물질적 욕망, 직함 있는 인생을 내려놓기

책 판매 수익을 모두 기부할 것이라는 최 박사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돈을 더 쓰고 싶지 않다”며 “연금으로 생활이 가능한데 그 외에 생기는 돈으로 맛있는 것을 사먹고 하는 것이 죄책감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인생의 3분의 1밖에 안 남았는데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다 왔니’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할 말이 없는 것이 두렵다”고 덧붙였다.

“어떤 인생이 잘 산 인생이냐 할 때 저는 직업을 떠나서 죽는 순간에 ‘돌아보니 괜찮았다’는 감정이 든다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는 저는 잘 살았어요. 근데 점점 떠날 시간이 가까워오는데 정말 후회가 없을까에 대해선 자신이 없어요. 살면서 힘든 사람을 너무 많이 봐 왔는데, 내가 저 사람들한테 무슨 도움을 줬을까 질문하는 건 너무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런 성찰은 그가 “물질적 욕망은 어느 순간에는 끊어주는 게 필요하다”고 여기게 된 배경이다. 기본적인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는 이상으로의 물질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고, 오히려 행복을 뺏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물질적 성취를 비교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런 실천을 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에도 최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본력으로 서로를 평가하는 것 외에도 직함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한국 사회의 전형성 추구는 ‘명함 없는 은퇴자의 삶’을 지향하는 최 박사에게 여간 골치가 아니다. 그가 이룬 사회적 성취로 볼 때 그저 나이 든 반려견과 하루를 보내고, 서예나 그림에 몰두하는 생활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느낌에 답답할 때가 많다고 한다.

“일은 원 없이 했고, 다른 인생을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 제 주변 유네스코 은퇴자들은 이걸 당연하게 생각해요. 식당 차린다고 요리 배우고, 강아지 데리고 여행을 다니거나 독수리 보호 단체 활동에 빠져있고 그래요. 커리어를 이어가며 ‘모습’을 갖춰야만 한다는 데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글·사진=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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