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년 뒤의 달력, 당신은 어떤 시간이 보이는가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2024. 6. 17.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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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와정, 약속된 언어 바깥의 장면들
1년을 365일로 약속하고 사는 오늘
2184년 여러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까
커튼에 쓰여지고 주름에 가린 문자들
그 의미를 잃고 무한한 퍼즐로 변한다

◆2184년도의 시간들

미디어 철학자 마셜 매클루언(1911∼1980)의 통찰처럼 인류는 두 개 이상의 시점 사이에서 ‘지속되는’ 시간의 개념을 인식한 이래 커다란 문화적 변혁을 겪었다. 지속되는 시간에 대한 감각은 비(非)문자 문화권에서는 생소한 것이었는데, 예컨대 에드워드 홀(1914∼2009)이 서구 문화권의 사람들과 호피 인디언의 서로 다른 시간 개념을 대조한 바 있다. 호피 인디언들에게 시간이란 균일한 지속성이나 선형적 연속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물과 사건이 동시에 공존하는 일종의 ‘복합체‘로서 여겨진다. “옥수수가 익어갈 때 혹은 양의 수가 늘어갈 때” 인식되는 하나의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덩어리로서 시간을 감각하는 이들에게는 삶의 개별성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시간’이 존재한다.

호피 인디언들의 시간 감각은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지닌 그것과 유사하다. 매클루언에 따르면 현대 물리학자들은 “더 이상 사건들을 시간이라는 용기에 담으려 애쓰지 않으며, 사건들마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세잔 이후의 화가들은 모든 감각들이 하나의 통합된 패턴 속에 공존하는 조형적 이미지를 회복했다.”

20세기의 혼란과 격동을 딛고 2024년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의 비선형적 시간선을 어렴풋이 상상해 보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다. 우주적 관점에서, 또는 미시적 세계에서 하루를 24시간으로, 일년을 365일로 나누어 세어 가자는 약속은 오직 인간 규모의 삶에 종속된 조건부 편의에 지나지 않는다.
로와정, ‘2184’(2024). 학고재 제공
로와정(RohwaJeong)의 작품 ‘2184’(2024)를 마주하며 떠올린 단상이다. 서기 2184년도의 날들을 추상화한 결과물은 아날로그 달력의 형식을 띠는데, 투명한 아크릴릭 판에 UV 프린트로 인쇄한 12개월의 달력 낱장을 층층이 쌓은 모습으로서 제시된다. 알아볼 수 없도록 중첩된 각각의 숫자는 저마다의 두께를 지녀 표면 아래 떨어지는 그림자의 공간 또한 만들어낸다. 달력의 상단에는 기하학적으로 재단된 다색의 반투명 아크릴릭 판을 여럿 포개어 유기체의 세포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유기적 복합체로서의 시간, 역학적 관계로서만 존재하는 생명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오늘로부터 160년, 지금 이 달력을 바라보는 누구도 살아 있지 않을 만큼 먼 내일인 동시에 상상해 봄직한 근미래다. 지구는 같은 속도로 공전할 것이고 작품도 자신의 아크릴릭 물성을 유지할 수 있겠으나 아마 인류가 변모할 것이다.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고, 존재에 관한 사유도 변화할 터이다.

◆이미지의 주름에 묶인 텍스트

로와정은 ‘관계’라는 커다란 주제 아래서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며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여 왔다. 서로 간의 관계로부터 출발해 개인과 사회, 교육, 문화 속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 등으로 관점을 확장해 나가는 가운데 섬세한 조율과 비평, 협의의 과정이 필수적 과제이자 동인으로서 작동한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로와정의 11번째 개인전 ‘눈길에도 두께와 밀도가 있다’가 열리고 있다. 19점의 신작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이달 5일 개막해 7월6일까지 계속된다.
로와정, ‘커튼’(2024). 학고재 제공
전시장 가운데 걸린 검푸른 ‘커튼’(2024)의 표면에 금빛 고딕체로 인쇄된 문구가 엿보인다. 다만 중앙부를 가지런히 묶어 둔 탓에 글자들이 천의 주름에 가려 의미를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전시 서문을 쓴 구나연 미술비평가의 표현에 따르면 커튼은 ‘땅에 발을 딛고도 매달려 있는 기분입니까?’라는 문자 언어를 “가두듯이 품고” 있다. “텍스트이면서 동시에 주름인” 이 커튼은 “언어가 지닌 의미의 망을 그대로 지닌 채 텍스트의 형태가 이미지로 탈바꿈”된 결과물이다. 문자에 내재한 관념을 가시화한 이미지로서의 커튼은 주름의 굴곡 안에 역설적 문답을 함의한 채 “그 자체의 사물성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지시하면서도 결코 맞아떨어질 수 없는 무한한 언어의 퍼즐을 갖게 된다.”

전시명 ‘눈길’은 바라보는 시선과 눈 내린 길을 동시에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으로 쓰였다. 두께와 밀도를 지닌 바라봄이란 어떤 종류의 시간을 포섭하는 응시일까. 발걸음 디디면 환영처럼 녹아 사라지는 눈밭의 두께와 밀도는 또한 어떠한 성질의 공간에 작용하는 부피일까. 달력의 중첩에 지워진 숫자들처럼, 커튼의 주름에 묶어 둔 문자들처럼 약속된 언어 바깥의 장면을 상상하고자 노력해 본다.

로와정은 노윤희(43)와 정현석(43) 2인으로 구성된 아티스트 듀오다. 각각 2005년과 2006년에 국민대학교 입체미술학과를 졸업한 이후 2007년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에이라운지(서울, 2020),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서울, 2019; 2018), 아마도예술공간(서울, 2016), 스페이스 비엠(서울, 2015), 갤러리 팩토리(서울, 2014), 갤러리 도향리(파리, 2014), 쿤스틀러하우스 슐로스 발모랄(바트엠스, 독일, 2009), 쌈지스페이스(서울, 2008) 등에서 개인전을 선보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아르코미술관, 하이트컬렉션,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웨스 등이 연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12회 광주비엔날레: 상상된 경계들’(2018)에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제주현대미술관 창작스튜디오(2022), 캔 파운데이션(2018), 헬싱키 인터내셔널 아티스트 프로그램(2017), 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15),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2013), 파리국제예술공동체(2012), 슬로스 플뤼쇼브(2010), 쿤스틀러하우스 슐로스 발모랄(2009),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2008) 등 국내외 다수의 주요 레지던시에 입주하여 작업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 중이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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