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뭉치면 산다?
얼마 전 열린 여당 제22대 국회의원 워크숍에서 “똘똘 뭉치자” “단일대오를 형성하자” 등의 말들이 오갔다고 한다. 총선거 패배 후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런 말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치에 책임을 지고 있는 여당 모임에서 여전히 ‘하나로 뭉치자’라는 담론이 지배적인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민주주의나 다원주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단계에 온 것 같지만 사실은 전근대적 풍토와 전체주의/권위주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통합’이나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같은 구호를 반복하고 있다. 분열의 언어는 즉각 지탄받기 마련이고 통합의 언어, 화해의 언어는 바로 주목을 받는다(때로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보수언론도 ‘국론 분열’을 개탄하며 비주류 의견을 억압하고 무슨 ‘내전’이 벌어질 것처럼 은근히 시민들에게 겁을 준다). 개별성 및 내부 균열에 따른 소수 의견 존중, 수평적인 관계, 다양한 이견(異見)의 존재와 그것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 등이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사회의 모습일 텐데 말이다. ‘단일대오’는 요즘 군대나 집단 스포츠에도 어울리지 않는 어휘다.
대선 주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 어떤 여당 의원은 최근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개헌은 정쟁이 아닌 미래, 분열이 아닌 국민통합, 야당의 사욕이 아닌 국가 혁신을 위한 개헌”이다. 얼핏 보면 별 문제가 없는 하나의 의견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민주적 다원주의의 측면에서 보면 좀 거슬리는 표현이 많다. 우리의 미래는 ‘정쟁’과 관련 없고 갈등 없고 싸움 없는 상태만 존재해야 하는가? 분열은 사악하고 통합은 좋기만 할까? 또한 여당의 언어는 공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고 야당의 태도는 ‘사욕’이라고 단정하는 근거는 대체 어디서 오는지 궁금하다.
‘분열 없는 사회’, 크고 작은 ‘싸움이 없는 사회’는 가능하지도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전체주의자나 꿈꾸던 이상향이다. 아마도 적지 않은 정치 엘리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식의 언어에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한 예로 선거철에 국회의원 후보들이 정당별로 똑같은 디자인과 색깔의 유니폼을 입고 선거운동을 하는 걸 보면서 어이가 없고 착잡했다(물론 한동훈은 획일적인 빨간색 유니폼 대신 같은 색깔을 기조로 디자인은 매우 다른 옷을 입는, 심한 자기애적 태도를 보였다).
이러니 의회에서 간헐적인 크로스 보팅(cross-voting) 같은 행동은 기대난망이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의 일부 강성 지지자들이 걸핏하면 비주류에 들이대는 ‘수박론’은 다원주의를 억압하는 일종의 언어폭력이다.
물론 의견의 통일은 그것이 민주적인 절차를 밟는 한, 정당에서 불가피한 일이다. 무조건 분열/갈등이 좋고 단결/통합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맥락과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뭉치자’는 담론은 뜬금없고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며 미래의 방향도 제시하지 못하는 퇴행적 구호이기 때문이다. 분열 및 갈등→통합→분열→통합이라는 순환 궤도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 실제 현실의 정치과정일 것이다. ‘대한 국민’ 상당수는 아직도 통합/미래/화해/단결/하나 됨의 언어를 긍정적으로만 생각하지만, 그것들은 사실은 매우 차별적이고 정치적인 수사다.
‘통합’은 억압이 되기 쉽고 ‘화해’는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와 진실 규명을 막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고 ‘단결’ 역시 독재자의 폭압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 내가 관계했던 한 프로젝트는 ‘통일’이란 단어가 가진 위험성을 인지한 연구자들의 고민이 깊었다. 자칫하면 남북한이 ‘하나’ 되자는 언어가 획일성을 강화하는 사회를 정당화할 가능성도 보였기 때문이다. 많은 논쟁과 토론이 있었다. 결국 ‘탈분단’이라는 사전에도 없는 개념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중심적 축으로 연구를 진행했고 홈페이지와 연구물에 ‘원코리아’ 대신 ‘멀티코리아’를 넣었다.
이승만 시대 때 유행했던 구호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실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뭉쳐라, 자신에게 충성하라고 외치는 구호에 불과했다. 이것이야말로 사적인 권력욕이 배어 있는 주장이다. 21세기에도 ‘이승만 재평가’를 토대로 1950년대의 구호를 반복해야 하는가?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여전히 민주정, 자유, 다원주의의 언어가 부족하다. 시인이자 생명 사상가였던 김지하는 오래전 이렇게 말했다.
“뭉치면 죽고 헤치면 산다.”
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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