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포용 사라진 분열의 세기, 우리가 그려야 할 시민의 모습은[2024 경향포럼 기고]
1951년 출간된 해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충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체주의 지도자들은 대중에게 명령을 내리고 이들에게 의존한다. 대중이 전체주의를 만든다.’
그렇다면 대중은 누구일까? 아렌트는 대중이 고도로 원자화된 사회의 분열에서 생겨난, ‘공공사에 입장이 없고, 함께 세계를 짓는 일에 무관심한, 단순히 수적으로 많은 집단’이라 말한다. 이런 집단에게 유일한 관심사는 대체로 자기 이익뿐이기에 타인과 함께 일하거나 돕는 일에도 무관심하다. 또한 대체로 자신의 삶 속에서 협력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타인에게 신뢰가 없을 뿐 아니라 공통의 이익에도 무관심하다.
문제는 이런 대중의 삶이 어려워질 때 시작된다. 경제적으로 먹고사는 일이 점점 더 난감해질 때, 이런 이유로 자신이 세상에서 고립되어 간다고 느낄 때, 그런데도 기존의 정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불확실한 삶에 관심이 없다고 확신할 때 대중은 ‘자기중심적’이면서도 ‘분노 어린’ 슬픔에 빠져들게 된다.
이런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대중에게 필요한 건 두 가지다. 우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존재로서 희생양들(특히 외부자)이다. 나치 시대에는 유대인들이었다. 둘째, 자신들을 구원해 줄 새롭고도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갈망이다. ‘아웃사이더’로서 히틀러가 이를 채웠다.
이처럼 일상의 삶이 어렵고 불확실할 때 대중이 빠져드는 ‘원한의 정치’는 쉽사리 ‘적대 정치’로 이어진다. 적과 동지의 편 가르기가 정치적 삶뿐 아니라 일상에도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일상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마저 꺼린다. 그래서 적대하는 사회는 말하는 사람만 존재하고 듣는 사람은 없는 곳이 되기 십상이다.
이처럼 ‘적대’가 일상화된 사회에선 두 가지가 사라진다. 우선 ‘다양성’이다. 나와 같은 생각과 입장을 가진 사람만 환대의 대상이 된다. 사람은 물론이고 정보마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내 입장과 다르면 거짓이 되거나 가치 없는 것이 되곤 한다. 두 번째는 ‘포용’이다. 이곳에서 포용은 ‘미덕’이 아니라 오히려 ‘위선’의 증거다. 가장 절박한 일은 ‘나의 생존’이다. 생존의 땅에서 너무 귀한 가치인 신뢰는 오직 나와 같은 편만 받을 자격이 있다. 적들에게 합당한 대우는 포용이 아니라 ‘조롱’과 ‘비난’, ‘차별’과 ‘혐오’다.
불행하게도 이게 21세기 우리 현실이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민주국가에서도 적대가 대중을 동원하고 권력을 차지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였다. 남미, 유럽, 심지어 우리 사회에도 트럼프를 모방하는 정치인들이 넘쳐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문명과 혐오>에서 데릭 젠슨이 간파하듯, 강력한 정치인에게 기대는 적대 정치의 갈망이 좌우를 넘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에서 묻는다. 도대체 누가 시민인가? 시민은 대중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나름의 답을 해본다면, 우선 시민은 ‘나와 다른 저들이 없다면 이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 여기지 않는 이들’이다. 분열의 시대에 ‘저들이 없다면’ 식의 발상은 조롱, 차별, 혐오가 난무할 수 있는 토대다. 이 세계는 누군가가 차지하는 소유물이 아니라 공유하는 대상이다.
여기에 더하고 싶은 시민의 자질은 ‘경청’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말한다. 경청은 ‘타자를 환영한다’고, 그러니 ‘다름을 드러내도 괜찮다’고, ‘당신의 말을 미리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겠다’는 아주 능동적인 ‘치유’의 행위라고.
그래서 경청하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말은 메아리처럼 반사되는 음성의 반복이 아니다. 경청은 ‘차이’를 허용하기에 그 ‘차이’는 ‘다양성’으로, 달라도 괜찮다는 ‘포용’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유로 경청하는 사람에게 ‘원한’이나 ‘적대’가 자리 잡을 곳이 없다.
한병철의 표현처럼, “친근함과 경청이 없으면 공동체는 형성되지 않는다. 경청하는 집단이야말로 공동체다”. 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그려내야 할 시민의 모습이란 생각이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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