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승자독식의 위험성

기자 2024. 6. 17. 20:0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승자에게 필요한 것은
양보와 관대함이다
승리의 정당성은
승리의 그 순간이 아닌
승리를 거둔 이후의
인식·태도서 만들어진다
‘의회독재’로 몰린
민주당과 이 대표는 물론
‘검찰독재’로 불려온
윤 대통령과 집권세력
모두에 해당하는 과제다
이들 중 누구도 자신을
피해자로 여겨선 안 된다
선거 승패와 상관없이
그들은 큰 힘 가진 승자다
그래서 독식의 위험성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승자독식은 멸망의 길이다. 정치에서든, 경제에서든 승자독식은 공동체 존속을 위한 정당성의 기반을 침식한다. 아무리 형식적 절차에 하자가 없다 해도 그렇다. 승자에 대한 견제와 균형, 승자와 패자의 교체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패자의 사망마저도 문제없는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승자독식은 정치와 경제의 원래 목적과 역할에도 어긋난다. 정치와 경제 모두 나눔(분배)을 위한 것이고, 나눔을 통해서만 작동 가능하다. 작동의 자격도 그래야 얻는다.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두 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묶음으로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가 경제(시장)를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라고 했던 것을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라는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것은 의회와 중상주의자들의 유착을 통한 권력과 부의 독점과 전횡 때문에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살림을 위한 경제활동(시장 진입)과 이익추구가 불가능한 현실을 타개해 나눔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분리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치와 경제 모두, 또 양자의 관계가 나눔의 증진이라는 결과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장 내 자유경쟁이 가능하면 분리를 강조하지만, 독과점 방지와 해소가 필요하면 결합을 강조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목도하는 정치경제적 현실은, 승자독식을 조장하고 비호하는 인식과 행태로 가득하다. 특히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그런 현실을 대표하고 주도한다. 부와 권력의 독점과 전횡을 나쁘지 않은 것으로 혹은 이상한 것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승자독식이 뭐가 문제냐”고 대놓고 항변하기도 한다.

총선이 끝나고 새로 여는 22대 국회의 원구성을 둘러싸고 승자독식 시비가 일고 있다. 총선의 승자인 더불어민주당이 법제사법위원회와 운영위원회, 그리고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등 알짜를 포함한 11개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직을 패자인 국민의힘과 협의 없이 단독으로 결정해 차지했기 때문이다. 특히 단원제인 한국 국회에서 ‘법률안·국회규칙안의 체계·형식과 자구의 심사’ 권한을 갖고 있어 상원으로 불리는 법사위원장 자리를 민주당이 가져갔다는 게 시비의 빌미가 되고 있다. 그간 한국의 의회정치에서 국회의장은 다수당이, 법사위원장은 다수당 견제를 위해 소수당이 맡는 게 관례였는데, 이를 더불어민주당이 다수당의 힘을 행사하며 위반했다는 것이다.

사실 관례라고 부를 만한 규칙이 딱히 정립되어 있는 건 아니다. 군부 권위주의 정권 시대가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 시대 이후 개원한 15대 국회 때부터 지금까지 28년 동안 18명의 법사위원장이 거쳐갔다. 그런 중에 원내 제2당 소속 위원장이 10회 있었지만, 다수당이 맡은 경우도 8회나 있었다. 야당 다수당 위원장은 4회, 여당 소수당 위원장은 2회 있었다.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의 당적이 같을 때도, 다를 때도 있었다. 관례가 작동했다기보다, 그때그때의 정세 상황에 따랐다는 게 더 정확하다. 지금처럼 여론과 야당의 요청을 무시하는 거부권의 빈번하고도 일방적인 행사를 바탕으로 한 대통령 권력의 전횡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의회 제1당 자리에 오른 야당이 승자독식의 시비에도 불구하고 법사위원장직 같은 ‘대항의 고지’를 양보할 공산은 낮을 수밖에 없다.

정치를 ‘도토리 키 재기식 쟁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당 견제를 위해 소수당이 법사위원장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과 주장이 무의미한 것도, 무용한 것도 아니다. 그리 여겨도 안 되고, 그리 만들어도 안 된다. 기계적인 적용은 가능하지도 않고, 정치의 역동성과 정세 반영성을 감퇴시키기에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승자독식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결국은 그 누구도 승자라고 할 수 없고, 승자가 된다 해도 별 소용이 없는 정치 현실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즉 승자를 인정할 수가 없고, 인정받는 승자를 세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승자는 단지 ‘나쁜 자 혹은 이상한 자’의 다른 이름이 된다. 심지어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무시하는 ‘파렴치한’이 된다.

승자의 존재 유무 자체가 정치를 나아지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탄탄한 민심을 얻어 강한 정당성을 확보한 승자의 부재는 갈등의 조정과 해소에 필요한, 또 갈등을 넘어서서 대안을 제시할 리더십의 형성과 권위의 작동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정치를 ‘고만고만한 것들 간의 쟁투’로 만든다.

쟁투만으로는 위기에 처한 공동체 상황을 타개할 수도 없고,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할 수도 없다. 적을 증오하고 비난하는 자신의 목소리만 키우고 그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게 함으로써, 적이 아닌 이들을 위한 나눔의 실천이 뒷전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는 상임위를 여야가 협의해 배분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민주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까지 했다. 다수의 지지를 받은 승자가 상임위원장 배정 권한을 보유하고 행사하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를 그릇되게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단 말 많고 탈 많은 온전치 못한 민주주의라고 해도-온전한 민주주의라는 게 어디 있겠냐마는- 반대의 자유가 보장되고 표출되는 한, 독식의 권한을 갖고 행사할 승자는 존재할 수 없다. 단지 합의가 이루어진 한도 내에서 나눔의 정도와 방식을 주도할 권한만을 가질 따름이다.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독식의 태도를 취하면 반대자와 비판자의 저항이 일고 곧바로 새로운 쟁투가 일어나 승자의 자격과 지위가 금방 사라진다.

상임위원장직 독식 자체보다 더 중요한 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의 관점과 방식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세 가지 오해가 있다.

첫번째 오해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인식이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전(前)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전에는 그렇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그렇지 않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시간을 먹고 자란다. 인내 속에 적마저 친구로 만드는 시간, 적마저 타당성을 인정하게끔 만드는 숙고와 숙의의 시간을 통해 민주주의는 자란다.

승자독식이 결국 민주주의 망쳐

두번째 오해는 민주주의가 부패로 망한다는 인식이다.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결코 금전적 부패만으로 망하지 않는다. 이는 정해진 형법에 따라 처벌하고 교정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 처벌과 교정이 쉽지 않은 - 생각과 말의 부패로 망한다.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일으키고, 서로를 적으로 만드는 생각과 말이 민주주의를 망친다. 생각과 말의 부패는 문제의 핵심(나눔의 문제)을 놓치고 자기들만의 소모적인 갈등을 벌이게 하며, 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소외시켜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의 기반과 권위를 무너뜨린다.

세번째 오해는 민주주의를 다수결과 등치시키는 인식이다. 이는 의사결정의 방식에 한해서만 맞다. 민주주의가 뭐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단지 의사결정의 방식에서만 찾아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역사적 기원과 목적에서 우선 찾아져야 한다.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목적은 약자들의 보호와 주권 행사의 구현이다. 다수결을 민주주의라고 말하려면 그것의 결과와 효과가 약자들의 보호와 주권 행사의 구현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다수도 아닌 과잉대표된 일부에 불과한) 다수의 횡포와 전제마저 민주주의로 규정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다수의 횡포와 전제는 소수의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생각과 말을 억압하는 효과도 가져와 민주주의의 다양성과 자기 쇄신 기회를 봉쇄한다. 결국 민주주의는 지속의 비용을 약자와 소수에게 전가하는 ‘공공악(public bads)’이 되어버린다.

승자독식에 대한 추종과 정당화는 세번째 오해와 직결되어있다. 그리고 첫번째, 두번째 오해와도 연결되어진다. 패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만만치 않은 또 다른 다수의 분노와 증오를 일으켜 숙고와 숙의의 시간을 빼앗는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승자독식이 결국 민주주의를 망친다.

승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몫을 오히려 작게 하는 양보와 관대함이다. 그것이 판단과 선택의 범위를 넓혀준다. 우호적인 관계의 망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승리의 정당성은 승리의 그 순간이 아니라, 승리를 거둔 이후의 인식과 태도에서 만들어진다. 경쟁과 협력의 관계를 주도하는 승자가 패자의 저항과 도전에 맞서 자신의 위상과 역할을 오랫동안 지속하기 위해 상기해야 할 사항이다. 22대 국회 개원 후 ‘의회독재’로 몰린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는 물론 정권 출범 때부터 ‘검찰독재’로 불려온 윤석열 대통령을 위시로 한 집권세력 모두에 해당하는 과제다. 이들 중 누구도 자신을 패자 혹은 피해자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략적 코스프레에 불과하다. 선거 승패와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막대한 힘을 가진 승자다. 그래서 독식의 위험성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