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광장] 국회 제도화는 입법관료를 통해

파이낸셜뉴스 2024. 6. 1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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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국회가 파행일 때 현장의 국회 공무원(입법관료)은 난감하다. 여야 의원은 정파적 집단주의로 똘똘 뭉쳐 자기 측 입장만 외쳐댄다. 양측을 다 지원해야 하는 중립적 국회 공무원은 양쪽 눈치를 보며 어정쩡해질 수밖에 없다. 요즘 상임위원장 배분 문제로 원 구성이 합의되지 않아 여당인 국민의힘은 위원회를 보이콧하고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 의원들만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수석전문위원부터 속기사까지 위원회 소속 공무원 모두 민망함과 어수선함을 느낄 것이다. 또한 반쪽 국회만 열려 한쪽의 발의 법안들만 힘을 받는 상황이라 입법차장, 의사국장부터 법제실 조사관까지 입법담당 공무원 모두 불안감을 느껴 책무에 전념하기 힘들 것이다. 단독 등원한 야당 의원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고, 나중에 정상화되었을 때를 생각해 너무 앞장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의원은 국민의 대표로서 주역이고, 국회 공무원은 지원조직으로서 조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가 서열적 상하관계에 있는 건 아니다. 양자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 국회를 함께 운영하는 대의민주주의의 파트너다. 연극 공연도 주역만으로는 되지 않고 조역이 꼭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정파성과 민의성을 중시하는 의원은 방향을 잡고, 중립성과 전문성을 추구하는 입법관료는 그리로 잘 나아갈 수 있게 여건을 조성한다. 이 둘의 조화와 균형이 있어야 국회가 안정 속에서 변화를 이룰 수 있고 제도화의 장점을 누리는 가운데 혁신의 미를 기할 수 있다. 여야 의원들의 합의 실패로 국회가 비정상적 혼란과 마비에 빠진다면 공동 파트너인 입법관료로선 황당한 일이다. 그건 유권자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입법관료에 대한 결례다.

입법관료가 의원들과 조화를 이루는 예로 미국 의회를 들 수 있다. 상하 각원에 의사규칙자문관(Parliamentarian)과 부속 조직이 있다. 그는 비선거직 관료이지만 기존의 규정과 선례를 해석해 의사규칙, 회의 절차, 법안 회부 등에 권위 있는 판단을 내린다. 예를 들어 본회의에 제출된 수정안의 내용이 규칙상 허용되는 범위에 있는지 판단한다. 상원에서는 특정 사안에 필리버스터가 허용되는지, 패스트트랙인 예산조정안에 어떤 내용이 포함될 수 있는지 등을 판별한다. 원칙상 그의 역할은 자문이지만, 실제론 절차 심판관으로서 제도를 지키는 준사법적 권한을 행사한다. 의원들의 정파적 자의성으로부터 규칙과 선례를 지키는 미국 의회 제도화의 보루다.

의사규칙자문관직이 근 100년 전쯤 창설돼 계속 독자 권한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건 의원들이 스스로 원하기 때문이다. 정파성을 띨 수밖에 없는 의원들이 규칙 적용·해석과 관련해 상호 합의를 이루기 쉽지 않다는 걸 그들 자신도 안다. 그래서 자신들이 교착에 빠졌을 때 각기 체면을 잃지 않으면서도 입법 과정을 작동시켜 국정 붕괴를 막기 위해 중립적 입법관료에게 심판의 재량권을 맡긴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 비판도 들린다. 입법관료에게 무슨 대표성이 있느냐는 거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지속적인 호응을 얻지 못한다. 오히려 대의민주주의를 더 성숙시킨다는 평가가 대세다. 의회 운영을 의원들에게만 맡겼을 때 생길 수 있는 제도화의 파괴, 의회 마비, 국정 붕괴를 중립적 입법관료가 막을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미국 의회 사례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국회의 운영 규칙 및 절차와 관련해 전문성과 중립성을 갖춘 입법관료에게 심판 역할을 맡기면 좋지 않을까. 국회에서 수십년을 근무해 규칙과 선례에 능통하고, 능력과 직업윤리에서 최고에 달한 입법관료에게 미국 의회 의사규칙자문관과 유사한 독립적 위상과 제도화된 권한을 부여하면 어떨까. 원 구성이나 의사진행과 관련한 국회의 고질적인 파행과 교착이 완화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의원들끼리는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 제3자의 역할을 활용할 순 없을까.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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