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몫까지 싸울게”…동생 박래전을 모란공원에 묻다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동생
‘광주학살 원흉 처단’ 등 요구하며
학생회관 옥상서 구호 외치며 분신
‘제발 살려달라’는 간절한 기도에도
전신 화상 탓에 가망 없다는 답변만
‘동생과 가족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흔들리지 않으려 이 악물며 애써 침착
분신 30분 전 내게 전화 걸어왔지만
의문사한 선배 조문하느라 통화 못해
“독하게 마음먹고 네 몫까지 싸울게”
모란공원서 관 위에 흙 덮으며 다짐
래전이가 분신이라니.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택시를 잡아탔다.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까지 가는 동안에 평소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래전이를 살려 주세요, 간절하게 기도했다.
병원 곳곳에 대자보가 붙어 있고, 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뭐가 뭔지 정신이 없었다. 국문과 최병현 선배가 나를 발견하고는 중환자실로 데려 갔다. 침상 위에 온몸을 붕대로 칭칭 동여맨 동생이 있었다.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동생은 쉑, 쉑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기계장치들도 여럿 있었다. 심전계는 녹색 그래프를 급하게 그리고 있었다. 동생은 눈을 뜨지 못했고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붕대로 감은 손을 잡았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숨을 쉬고 있으니 아직 살아 있는 건데…. 차가운 손을 놓으며 아마 휘청였던 것 같다.
그러자 최 선배가 나를 부축해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병원 계단에 앉아 담배에 불을 주었다. 담배를 빨 수가 없었다. 목울대가 너무도 아팠다. “네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면서 래전이가 쓴 유서를 건넸다. 눈물이 앞을 가려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악몽 같은 나날들
부모님과 가족, 친척들은 1층 보호자 대기실에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아버지가 대성통곡을 했다. “래군아, 어떡하냐. 이놈들아. 내가 니들을 뭐하려고 공부시켰냐! 운동이 뭐라고!”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울기만 하셨다. 전날 래전이 병실에 들어간 어머니는 래전이 손을 잡고는 “래전아, 장하다! 정말 장하다! 어서 일어나라! 일어나서 엄마와 같이 싸우자! 이 에미는 너를 다 이해할 수 있다. 엄마도 이제부터 너랑 같이 싸우마! 어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셔서 주위 사람들을 울렸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학생들이 병원에서 집회를 한다고 해서 가족 대표로 말을 하긴 했지만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래전이를 지키고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침착하자, 냉정하자고 몇번씩 마음을 다져 먹었다. 나는 중환자실 주위에서 줄담배를 피워대며 서성였다.
사람들은 동생이 가망이 없다고 했다. 병원 벽에 붙은 속보에는 전신 80%에 3도 화상을 입었다고 적혀 있었다. 병실에 들어갈 때면 심전계의 녹색 그래프를 유심히 봤다. 점점 그래프가 수평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몇 번의 위기가 왔는데 그때마다 의사며 간호사들이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운명의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래전의 몸에 매달렸던 심전계가 삑삑 경고음을 울리고, 녹색 그래프가 높낮이 없이 수평으로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의사가 더는 호흡기로도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고 했다.
1988년 6월6일, 낮 12시23분. 호흡기를 떼어냈다. 동생은 화상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만 25년을 같이 살았던 내 동생이 운명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은 미어지고, 뜨거운 눈물이 솟았지만, 눌러서 참고 참았다.
입관하는데 동생 몸이 숯덩이였다. 내 동생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입관을 하고, 드라이아이스를 관에 가득 채웠다. 시신은 숭실대로 옮기기로 했다. 6월 초인데도 태양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아스팔트 열기는 숨 막힐 듯이 뜨거웠다. 운구차를 에워싸고 학생들이 행진을 해서 병원에서부터 학교로 이동했다. 학교 채플실에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고, 거기에 래전이를 안치했다. 학교에서는 매일 결의대회가 열렸고 장례 준비로 분주했다.
장례는 ‘민중해방열사 고 박래전 민주국민장’으로 하기로 했다. 장례일이 6월12일로 정해졌다. 7일장이었다. 장례위원회 위원장은 백기완 선생님이, 부위원장은 문익환 목사님 등이 맡아주셨고, 민주화운동 인사 거의 모두가 장례위원회에 이름을 올렸다. 장례집행위원장은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전상훈이 맡았다. 같은 정파를 대표하는 학생 대표였기 때문이다. 장례의 온갖 일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호상’은 숭실대 인문대 부학생회장을 하던 윤은경이 맡았다. 지금도 윤은경이 흰 상복을 입고 래전이 영정을 들었던 애처로운 모습이 기억난다. 장지는 ‘전태일 선배가 있는 곳으로 하자’는 이소선 어머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마석 모란공원으로 정했다.
동생 박래전은 그해 6월4일 오후 4시 직전에 세계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나를 찾았다고 한다. 그때 나는 의문사 당한 연세대 선배 고정희 씨 빈소(강남 가톨릭성모병원)에 조문을 가느라 통화를 하지 못했다. 분신을 결행하기 약 30분 전이었다. 생의 마지막이었을 전화를 받지 못했다. 오후 4시20분께, 래전이는 숭실대 학생회관(현재의 미래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 있다! 끝까지 투쟁하라. 청년 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 파쇼 타도하자!”고 외쳤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구호 소리를 들었다. 곧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학생들이 옥상으로 뛰어 올라와서 소화기로 불을 껐지만, 이미 래전이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뒤였다. 병원으로 옮기는 중에도 “광주는 살아 있다. 내가 죽더라도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광주는 살아 있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비로소 래전이가 남긴 유서를 읽었다. 유서는 “어머님, 아버님께”,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백만 학도에게” 등 3통이었다. 비공개 유서도 한 통 있었다. 유서 끝에는 “광주민중항쟁 8년 6월2일”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6월1일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으니, 생일 다음 날 작성한 것이었다. 유서에서 래전이는 광주학살 주범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야 하고, 보수야당들이 광주의 진상규명을 정치적으로 타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에 더해 서울올림픽을 이유로 민중생존권을 탄압하는 노태우 정권을 강하게 규탄했다. 양심수의 전원 석방과 자유로운 통일 논의의 보장도 요구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 이후 극심한 분열상을 보이는 운동진영에 무조건 통일단결을 위한 작업에 착수할 것을 요구했다. 부모님 앞으로 쓴 유서에서 “어머님, 아버님. 이 시대의 군부독재는 우리의 손으로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미국 놈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통일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하고, 마지막에는 “아버님, 모질게 먹은 마음이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아요. 어머님, 아버님, 안녕히”라고 적었다.
6월12일, 장례행렬은 아침 일찍 학교를 나섰다. 동생 모교였던 고향의 송산고등학교를 들러 서신중학교를 찾았다. 아무도 없었다. 텅 빈 학교 운동장에 우리만 있었다. 나는 악에 받쳐서 소리를 질렀다. 제자가 죽어서 왔는데 맞아주는 선생 한명 없다는 게 너무 속이 상했다. 시골집에도 들렀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 나와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래전이는 그해 부처님 오신 날인 5월23일 마지막으로 집에 들렀다. 20일 만에 래전이는 저세상 사람이 돼 집을 찾아왔다.
서울로 돌아온 장례행렬은 경희궁터(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서울시청을 거쳐서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그사이 내 머릿속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관할 때 어머님이 관을 붙잡고 놓지 않으셨다. “나도 같이 가자. 래전아, 엄마도 같이 가자”고 울부짖으셨다. 그 어머님을 간신히 떼어놓고 관 위에 흙을 덮으면서 다짐을 했다. ‘래전아, 네 몫까지 내가 할게. 네가 바라던 민중의 새 세상 만들 때까지 독하게 맘먹고 싸울게’ 하고 다짐했다. 그때 동생 박래전은 스물여섯이었고, 나는 스물여덟이었다.
박래군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평균 420억 상속하는 955명에게 세금 깎아주자는 대통령실
- 최태원 이혼 판결문 수정…노소영 재산 분할액도 바뀌나
- 승인 권한 없는 윤 대통령이 동해 석유 5차공까지 ‘승인’
- [단독] 서울대병원 집단 휴진 첫날, 외래진료 27% 줄어
- 김정은·푸틴,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복원할지 최대 관심
- [단독] 백종원 믿었는데…“매출, 본사 45% 늘 때 점주 40% 줄어”
- 간호사 출신 시골 ‘주치의’ 차에서 애 받고…“20년간 환자 곁에”
- “알아서 할게!” 하는 자녀에게 이렇게 말해보세요
- ‘아버지 고소’ 박세리, 18일 입 연다…“사실관계 정확히 알릴 것”
- 4년 전 도난 추정 신윤복 ‘고사인물도’ 행방을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