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약속’ 비틀고 어긴 일본, 사도광산은 다를까 [뉴스룸에서]

조기원 기자 2024. 6. 1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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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광산 주변에는 80여년 전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광산 뒤쪽 빈터에 돌무더기가 쌓인 곳이 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이 매일 밥을 먹던 식당 자리다. 안내판 하나 없이 휑한 모습이다. 사도/김소연 특파원

조기원 | 국제부장

2019년 가을의 일이었다. 조선인 강제노동으로 유명하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공식 지명은 하시마) 등에 대해 우파 일본 민간단체가 쓴 보고서를 우연히 읽게 됐다. 보고서를 쓴 민간단체의 이름은 ‘산업유산국민회의’로 일본 근대 산업 노동의 역사를 조사해달라는 아베 신조 일본 정부의 의뢰를 받아 보고서를 작성해왔다. 보고서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었는데, 일본 시민단체인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가 정보공개청구로 받아내 외부에 알려졌다.

산업유산국민회의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 정부에 세차례 제출한 보고서에는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기술이 빼곡했다. “조선인 탄·광부 임금은 일본인과 큰 차이가 없었고 민족 간 임금 차이가 민족 차별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적힌 논문이 실렸다. 노동운동 참여 경력이 있다는 사람이 “조선인이 특별히 학대받았다는 사실은 군함도에서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는 대목도 포함됐다.

이런 보고서가 작성됐던 이유는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정부는 그해 군함도가 포함된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정부 대표인 사토 구니 당시 주유네스코 일본대사는 조선인 강제노동 역사를 지적당하자 “과거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강제로 노역’했던 일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유네스코는 당시 일본 정부에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 전략’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조선인 강제노동 사실을 제대로 알리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군함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성공 뒤 아베 정부는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베 정부는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시설로 기획했다며 2020년 3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개관했다. 센터 운영은 산업유산국민회의에 맡겼다. 취지대로라면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조선인 강제노동 역사를 알리는 내용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 전시는 없었다. 오히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없었다는 주장이 강조됐다. 급기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2021년 유감을 표하는 결정문을 냈다. 이후 이 센터 전시에 큐알(QR)코드를 찍으면 2015년 일본 정부 대표가 영어로 한 발언을 들을 수 있게 한 정도가 추가됐을 뿐 큰 변화는 없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정부가 추진하는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신청도 군함도와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대상 기간을 에도 시대(1603~1867)로 신청해, 일제강점기 약 1500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강제동원돼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던 역사를 덮으려 하고 있다. 이는 군함도 신청 때 대상 기간을 메이지 시대(1868∼1912)로 한정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이런 일본의 시도가 유네스코에서 일단 제동이 걸린 것도 유사하다. 최근 유네스코의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사도 광산에 대해 등재 보류를 권고하면서 “광업 채굴이 이뤄졌던 모든 시기를 통해 추천 자산에 관한 전체 역사를 현장에서 포괄적으로 다루는 설명 및 전시 전략을 수립하고, 시설 및 설비 등을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도광산의 경우는 군함도 때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적어도 2015년 군함도 세계유산 등재 때 했던 일본의 약속이나 표현보다 낮은 수준의 내용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일본 정부가 약속을 해도 군함도 때처럼 다시 취지를 비틀거나 약속을 어길 가능성이 있는데, 2015년 일본 정부 대표 발언 때보다 못한 표현을 받아들이면 이후에 한국은 목소리를 내기조차 힘들어질 수 있다.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여부는 다음달 21~31일 인도에서 개최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일본 정부는 한국 설득 작업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최근 “한·일 양국 간 진지하고 성실하게 협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관련해 일본에 일방적으로 양보했던 윤석열 정부가 과연 과거사 문제를 직시하고 진지한 자세를 취할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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