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 없어지지 않는 것 [똑똑! 한국사회]
송아름 | 초등교사·동화작가
17년 동안 교사로 일하며 손에 꼽을 정도로 힘들었던 적이 두번 있었다. 한번은 학구에 오래된 달동네가 있는 ㄱ학교에 근무하며 고학년을 맡았을 때였다. 그해 우리 반에 유독 그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많았다. 한 아이에게 등굣길을 물어보니 집에서 출발해 가파른 계단길을 15분, 산복도로를 건너 비탈길을 5분 더 내려온다고 했다. 하굣길은 오르막이라 30분이 걸렸다. 그곳은 이미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퇴거 날짜가 정해지자 학급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이주가 결정된 아이들이 매일같이 문제를 일으켰다.
오랫동안 살았던 집을 떠나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살게 되는 것도, 매일 언덕길을 함께 오르내리던 친구들과 헤어져 전혀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도,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에겐 가혹한 일이었다. 소박하고 평범했던 아이들의 세계가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론 그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미칠 악영향을 끊임없이 걱정해야 했다. 아이들이 집에 간 뒤 텅 빈 책상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매일 일기를 쓰듯 그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네 말과 행동이 진심이 아닌 걸 안다, 우리 다시 힘내보자’고. 그 말은 사실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어떤 상황이든 아이들을 믿고 싶었고, 나부터 힘을 내야 했다.
ㄴ학교에 근무할 때에도 고학년을 맡은 해에 유독 사건이 많았다. 어느 날 아이들 간의 사소한 싸움에 학부모 한분이 개입한 것 때문에 다른 학부모님들이 중재를 요청하며 학교를 찾아왔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그분들은 ‘우리끼리 얘기하면 싸움밖에 안 될 것 같아 선생님을 찾아왔다’고 하고서는 나를 사이에 두고 다짜고짜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싸웠다. 아이들 문제는 작은 불씨에 불과했을 뿐, 해묵은 감정의 골이 깊었다. 아이의 담임교사 앞이라면 그래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게 학부모 마음일 텐데, 대체 왜 그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듬해에 ㄴ학교를 떠난 뒤 그 지역이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똑같은 시험을 두번 보면 다음엔 더 잘 볼 것 같았는데, 외려 더 망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두 해의 경험으로 나는 깨달았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에 누군가가 휩쓸려 떠내려갈 때 교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백번이면 백번, 지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져야 한다는 사실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화가 나서였는지, 미안해서였는지, 기꺼이 선택한 진로에 대한 욕심이었는지 모르지만 한번쯤은 교사로서 100점 맞은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온갖 연수를 찾아 듣고 교육 관련 도서를 읽었다. 내일은 더 나을 거고, 다음해에는 더 잘할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눈을 감았다 뜨면 10년쯤 지나 있고, 능숙하게 아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사가 된 상상을 자주 했다.
그런데 사회가 변하는 속도는 항상 내 경험치를 뛰어넘었다.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정말 10년이 지났을 때, 교사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욕설을 하고 눈을 희번덕거리는 아이들을 겨우 챙겨 집으로 보내고 교실 바닥에 흩어진 지우개 가루를 청소하다가 교사가 꼭 지우개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말랑말랑한 지우개는 잘 지워지는 대신 빨리 닳는다. 공감 잘하고 이해심 많은 교사는 그만큼 빨리 지친다. 그렇다고 마냥 단단해지는 것도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단단한 지우개는 잘 닳지 않는 대신 잘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를 하나도 내주지 않는 교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말랑하든 단단하든 결국 교사는 소모품이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떠나도 누군가는 그 자리를 채울 것이고, 그가 다 닳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아주 단순한 꿈을 갖게 되었다. 그건 아이들 곁에서 닳아 없어지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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