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첫 여성 대통령은 우연이 아니다
“200년 공화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앞서 여러 차례 말한 것처럼, 나 혼자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조국을 세운 여성 독립투사와 선조들, 우리의 어머니와 딸들과 손녀들까지, 우리 모두 여기에 함께 도착했다.”
2024년 6월2일 치른 멕시코 대통령선거에서 집권당인 국가재건운동(MORENA·모레나) 후보로 나서 60% 가까운 지지율로 압도적으로 승리한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당선자는 축하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세계 언론이 ‘마초의 나라’ 멕시코에서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흥분했다. 정작 멕시코 내부에선 차기 대통령의 성별 따위엔 큰 관심이 없는 모양새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후보 3명 가운데 셰인바움 당선자에 이어 득표율 약 27%로 2위를 기록한 보수정당인 국민행동당(PAN) 소속 소치틀 갈베스 후보도 여성이다. 유일한 남성인 중도 좌파 시민운동당(MC) 소속 호르헤 마이네스 후보는 10% 남짓한 득표율로 3위를 차지했다. 선거 이전부터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은 당연한 수순이었단 뜻이다. 멕시코는 더 이상 ‘마초의 나라’가 아니다.
사상 첫 유대계 ‘좌파’ 대통령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파르도는 1962년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계 조부모는 1920년대 리투아니아에서 멕시코로 이주한 유대계다. 모계 조부모도 1940년대 불가리아에서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이주한 유대계다. 셰인바움 당선자는 멕시코의 ‘사상 첫 유대계 대통령’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엔 조부모 집에서 유대 명절을 함께 쇠기도 했다지만, 과학자인 부모는 그를 ‘세속적’으로 키웠다.
“유대계라는 내 뿌리와 멕시코에 대한 사랑과 세계시민이란 정체성에 따라 정의와 평등, 박애와 평화를 갈망하는 수많은 이들의 바람을 공유한다.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이 벌이고 있는 무차별 공습에 경악한다. 민간인 학살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즉각적인 휴전과 이스라엘군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는 전세계 모든 이들과 연대한다.”
셰인바움 당선자는 2009년 1월12일치 멕시코 진보 일간지 <라 호르나다>에 보낸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이스라엘군이 ‘캐스트 리드’란 작전명으로 3주가량 가자지구를 침공해 무차별 공세를 퍼붓던 때다. 셰인바움 당선자는 2023년 10월7일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침공한 직후부터 선거운동 기간 내내 민간인 피해를 비판하며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해왔다. 그가 ‘유대계’라는 가족의 뿌리보다 ‘좌파’란 정체성을 더 중시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일간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6월5일치에서 “중도우파가 주류인 약 5만 명에 이르는 유대계 멕시코인들은 셰인바움 당선자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고 전했다.
‘좌파’는 집안 내력이다. 보석상이었던 부계 할아버지는 멕시코 공산당의 열혈 당원이었다. 생물학자인 어머니와 화학공학자인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인 1968년 멕시코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석 달여 이어졌던 ‘멕시코판 6·8 운동’에 적극 참여한 ‘운동권’ 출신이다. 셰인바움 당선자도 멕시코국립자치대학(UNAM) 물리학과 재학 시절인 1980년대 ‘전국대학총학생회연합’(CEU)에서 활동했다. 그가 2016년 합의 이혼한 카를로스 이마스는 CEU 의장을 지냈다. CEU 출신 청년 운동가들은 1989년 좌파 정당인 민주혁명당(PRD) 창당을 주도하기도 했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현 멕시코 대통령도 이 무렵 PRD에 합류했다.
시 정부 환경장관 발탁돼 정치권 입문
에너지공학 전공으로 석·박사 과정을 마친 그는 미국의 저명한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그는 멕시코와 여타 선진국의 에너지 소비 행태를 비교·분석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5년 연구원 신분으로 모교로 복귀했다. 그가 연구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인 2000년 지방선거에서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수도 멕시코시티 시장으로 당선됐다. 그는 시 정부 각료의 절반을 여성으로 채웠다. 셰인바움 당선자도 이때 시 정부 환경장관으로 발탁돼 현실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그는 재임 기간에 대중교통 확충과 숲 가꾸기 사업 등에 집중해 대기오염으로 악명 높던 멕시코시티의 매연 절감에 성과를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6년 7월 치른 대선에 PRD 후보로 출마한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0.6%포인트(약 24만 표) 차이로 펠리페 칼데론 PAN 후보에게 석패했다. 셰인바움 당선자는 학교로 복귀했다. 그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에 참여해 연구평가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다. IPCC는 인간이 기후변화에 끼친 영향을 연구하고 이를 널리 알려 기후변화 문제 해결을 위해 기여한 공로로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공동으로 200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12년 대선에 다시 나선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부정선거 논란 속에 다시 패배했다. 그는 PRD에서 탈당해 모레나 창당을 선언했다. PRD 지도부가 재집권에 성공한 보수 여당인 제도혁명당(PRI) 쪽과 손을 잡았다는 게 명분이었다. 2014년 선거관리위원회에 공식 등록된 모레나는 2015년 6월 하원의원 선거에서 35석을 얻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했다. 한동안 학계 활동에 집중하던 셰인바움 당선자도 당시 함께 실시된 지방선거에 출마해 멕시코시티의 틀랄판 구청장에 당선되면서 다시 정치 전면에 섰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2018년 대선에서 ‘3수’ 끝에 약 53%의 득표율을 올리며 멕시코 사상 ‘첫 좌파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함께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셰인바움 당선자는 멕시코시티 시장에 당선됐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이른바 ‘마초의 요새’였던 멕시코가 미국보다 먼저 여성 대통령을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6월3일치에서 “셰인바움 후보의 당선은 멕시코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핵심 요소로서 장기간 이어져온 정치권의 성평등 운동이 마침내 정점을 찍었음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정치권 성평등 운동의 정점”
멕시코에서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된 것은 1953년의 일이다. 이후 진보적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여성의 참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1993년 선거제도 개혁 논의 과정에서 선관위가 각 정당에 공직 후보자의 30%를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권고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1929년 창당 이후 71년여 집권당 지위를 잃지 않았던 PRI의 사실상 ‘일당 독재’는 2000년 대선 때 빈센테 폭스 PAN 후보가 승리하면서 막을 내렸다. 멕시코의 제도적 민주화가 본격화했다. 2002년 ‘권고사항’이던 공직 후보자 여성 30% 할당제가 의무화했다. 이어 2008년엔 여성 할당제 비중을 40%까지 높였다.
제도 개혁은 쉽다. 관성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제니퍼 피스코포 미국 옥시덴털칼리지 교수(정치학)는 2023년 9월 발표한 ‘30%에서 완전한 성평등까지: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 강화를 위한 멕시코의 기나긴 여정’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여성할당제를 두고 온갖 꼼수가 난무했다”고 짚었다. 이를테면 지역구 후보 할당 의무는 “당내 경선에서 여성 후보가 패배했는데 어쩌란 말이냐”는 말로 유야무야됐다. 비례대표 할당 의무는 여성 후보를 당선권 밖 후순위에 배치하는 식으로 피해갔다. 결국 2014년 정당법 개정 과정에서 정당별로 과거 선거 결과에 따라 지역구를 △우세 △경합 △열세 등 3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지역별로 성별 안배를 따로 하도록 하는 방안이 추진됐다. 기득권은 완강하게 버텼다. 결국 “여성 후보를 일방적으로 열세 지역에만 배치해선 안 된다”고 권고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상황은 2018년 대선에서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당선된 뒤 급물살을 탔다. 모든 공직에서 남녀 성비를 똑같이 하도록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개헌안이 2019년 5월 의회를 통과했다. 모든 분야에서 성평등 원칙을 적용하고(2, 3조), 정부 공공기관(41조)·정당(51조)·하원(52, 53조)·상원(56조)·대법원(94조)·지방정부(115조)에서 임명직·선출직 구분 없이 남녀 비율을 일치시켰다. 개헌에 이어 선관위가 제도 이행을 강제했다. 각 정당이 성별 동률 원칙을 지키는지 감시했고, 성차별 발언 정치인은 출마 자격을 박탈했다. 멕시코에서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실제 이번 대선과 함께 실시된 멕시코시티 시장과 8개 주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선관위는 9개 지역 가운데 5개 지역을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명했다. 이에 따라 집권당 모레나의 멕시코시티 시장 후보 당내 경선에 나선 오마르 가르시아 하르푸츠 후보는 1위(득표율 40.5%)를 차지하고도, 차점자인 클라라 브루가다 후보(26.7%)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브루가다 후보는 무난히 과반 이상을 득표하며 시장에 당선됐다. 모레나는 9개 지역 가운데 7개에서 승리를 거뒀다. 후보직을 양보한 하르푸츠는 상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셰인바움 당선자는 경찰 출신으로 자신의 시장 재직 시절 시 정부 치안 장관을 지낸 그를 차기 정부 각료로 입각시킬 것이라고 공언한 상태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집권 이후 빈곤 퇴치와 불평등 해소를 국정운영의 핵심으로 삼았다. 2018년 미화 4.5달러 수준이던 최저임금은 2022년에 12달러 선까지 높아졌다. 같은 기간 빈곤율은 49.9%에서 43.5%까지 떨어지면서, 약 540만 명이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 멕시코에서 기승을 부리는 마약 등 조직범죄 대처와 관련해선 ‘총알 대신 포용’을 전면에 내걸었다. 앞선 정부가 추진했던 ‘범죄와의 전쟁’ 대신 범죄의 원인인 빈곤 퇴치를 통한 범죄율 낮추기를 정책의 뼈대로 삼았다. 2018년 10만 명당 25.8명이던 멕시코의 살인사건율은 2023년 10만 명당 23.3명까지 떨어졌다. 변화는 기대보다 더디지만, 성과는 쌓이고 있다. 임기 막바지임에도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60%대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이념적 후계자’인 셰인바움 당선자는 선거운동 때 정책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무상교육과 연금, 빈곤층 지원정책은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그는 기후 전문가답게 재생가능 에너지 투자 확대도 전면에 내세웠다. 대선과 함께 실시된 총선에서 모레나는 노동당·생태녹색당 등 좌파 정당과 연대해 상·하 양원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했다.
셰인바움 당선자는 10월1일 취임한다. 새 의회는 9월1일 개원한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새 의회 개원 뒤 남은 한 달 임기 동안 개헌안 논의를 집중할 방침이다. 그가 지난 2월 제시한 개헌안에는 동물권을 헌법에 명시하고, 최저임금을 물가상승률과 연동시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대법관과 각급 선관위 위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하는 방안도 담겼다. 셰인바움 당선자도 이에 적극 찬성한다. 멕시코 민주주의가 새로운 시험대로 향하고 있다.
여성의원 비율 OECD 평균 못 미치는 한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자료를 종합하면, 5월30일 개원한 제22대 대한민국 국회의 여성의원 비율은 ‘역대 최고’다. 지역구 의원 254명 가운데 36명, 비례대표 46명 가운데 24명이 여성이다. 전체 300명 의원 가운데 60명, 남성 대 여성 비율은 ‘80대 20’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는 33.8%다. 앞선 제21대 국회의 여성의원은 전체의 19%인 57명(지역구 29명, 비례 28명)이었다. 그러니 묻게 된다. ‘마초의 나라’는 대체 어디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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