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합시다, 좀 [왜냐면]
이경수 | 강화도 주민
육영수 여사 무덤 옆에 선글라스를 쓴 군복 차림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 있다. 박정희 옆에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당대 최고 인기 배우다.
1970년대, 강화도 북산에서 주운 ‘삐라’(전단)에 그려진 만화 얘기다. 어린 나에게 꽤 강한 인상으로 남았던 것인지, 지금도 북한에서 날려 보낸 그 삐라 속 그림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그랬다.
동네 아이들과 뒷산에 올라 여기저기 떨어진 삐라를 주워다가 사각 딱지를 접어서 놀았다. 가끔은 주운 삐라를 파출소에 갖다 주고 연필을 받아오기도 했다.
세상은 거의 언제나 시끄러웠다. 깊은 밤은 더했다. 남과 북이 누구 목소리가 더 큰가, 경쟁하듯 방송을 틀어댔다. 강화도 북산 주변에서 대남방송과 대북방송이 서로 섞여 대융합을 이루곤 했다. 그 끔찍한 소음을 소음이라고 여기지도 못하고 나는 자랐다. 일상이었으니까. 과장이 아니다. 인천 강화도는 남한 땅 최북단이다. 최단거리 기준으로 북한과 1.8㎞ 떨어져 있다.
여러 해 전, 남과 북의 합의로 모든 방송이 멈추고 확성기가 철거되면서 세상이 조용해졌다. 통일된 기분이었다. 그랬는데, 2024년, 다시 북한에서 내려보내는 방송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강화군 교동도 교동읍성 앞바다에서 쌀이 가득 담긴 페트병을 본 적이 있다. 북으로 흘러가야 할 쌀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교동도 남쪽 갯가에 이른 것이다. 탈북민 단체들이 강화에 와서 북으로 대북 전단을 보내고, 이렇게 쌀도 바닷물에 던지곤 한다.
북한이 이에 반발해서 풍선에 오물을 매달아 남쪽으로 보냈다. 강화 석모도 등지에도 북한산 오물이 떨어졌다. 그러자 남한이 대북방송을 다시 시작했다. 북한은 대남방송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방송이 문제가 아니다. 이러다가 강화도이건 다른 곳이건, 남북 간 전투 행위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적지 않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 누가 죽고 다치나. 높은 분들이 아니다. 우리 아들들 국군 장병들이고, 해당 지역 주민들이다. 누구 잘못인가. 나라 잘못이다. 단 한 생명이라도 보호해야 할 의무가 국가에 있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해결책은 간단한 것 같다. 탈북민 단체들이 대북 전단을 보내지 못하게 하면 된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정부의 견해는, 맘껏 전단을 보내라는 시그널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왜, 우리가, 무엇이 부족해서 북한 정권을 자꾸 자극해야 하는가. 저들이 진저리치며 싫다고 하는데, 굳이 계속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대북 전단 살포를 표현의 자유 문제로 해석하는 게 적절한지 모르겠다. 표현의 자유는 남한 땅에서 남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보장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은가. 삐라 살포는 전쟁의 한 행위, 심리전의 한 갈래로 규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 정부에게, 북한에 평화를 구걸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에 굽신, 저자세를 취해서라도 군사적 충돌을 예방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건 나도 싫다. 북한이 막내라면 남한은 정치, 군사, 경제, 외교 모든 면에서 큰형 격이다. 큰형답게 의연하게 대응하면 좋겠다. 형이 동생과 같은 수준으로 행동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사실 북한 정권도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뭔가 남한으로 보내서 대북 전단에 대해 경고하되, 남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위해가 되지 않는 것? 그 결론이 쓰레기였을 것이다. 대남 전단은 효과가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북한산 쓰레기! 불쾌하다. 유치하다. 기다렸다는 듯, 대북방송을 ‘일단’ 개시한 우리의 대응도 사실 좀 그렇다. 부디 ‘일단’으로 끝냈으면 좋겠다.
탈북민 단체들이 북한으로 전단 등을 보내는 것은 북한 주민을 돕고, 통일도 앞당기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남북 간 갈등이 더 심해지고, 충돌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 불완전한 평화마저 위협하고 있다. 자제를 정중히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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