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폭격기의 아버지’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2024. 6. 17.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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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반경 5230㎞, 최대 9000㎞ 비행
많은 폭탄탑재 막강한 자체무장 자랑
핵폭탄 실제 투하 ‘유일무이’ 폭격기

모든 무기가 그렇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잔악한 무기체계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Boeing B-29 Superfortress)는 도쿄 상공에서 소이탄을 뿌리고 두 발의 핵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폭격기이기 때문입니다.

1939년 4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불과 5개월 전에 미 육군 항공단 관계자들은 독일 공군을 참관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1935년 나치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맺은 평화협정인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한 뒤 군비 증강에 열을 올렸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무언의 협박을 하기 위해 주변국 군 관계자들을 초청해 훈련을 참관시키거나 신무기를 공개하기도 했죠.

미군 관계자들은 그렇게 준비된 독일의 초대에 응했던 겁니다. 당연히 생각보다 강한 독일 공군력과 폭격기 전력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호전적인 나치의 성향을 생각하면 나치가 언제든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1934년부터 개발을 시작한 B-17 폭격기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즉시 그보다 2배가 넘는 작전반경과 폭장량을 요구했고 B-17을 만들고 있던 보잉은 XB-29를 제안해 채택됐습니다.

보잉의 제안은 당대 최고 기술의 집합체로 평가됐습니다. 그 사이 이미 전쟁은 시작된 터라 미군은 고민할 필요도 없었죠.

1940년 6월, 당시 나왔던 설계도만 보고 5기를 선 발주했습니다. 아직 전장은 유럽이었고 미군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면서 얘기는 달라졌습니다. 참전을 결정한 미국은 전시 경제로 전환했고 모든 군수공장의 가동을 가속화했습니다. 1942년 9월 21일 설계도만 보고 계약한 지 2년 3개월 만에 시애틀 보잉필드에서 XB-29 시제1호기의 시험비행이 이뤄졌던건 이런 이유에섭니다.

서둘렀던 탓일까요? 1943년 2월 18일. 시제 2호기가 비행 중 엔진 화재로 기체가 추락하면서 승무원 전원과 23명의 시민이 사망하는 참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보잉은 참사의 아픔을 딛고 같은 해 7월 모든 요구조건을 충족하는 완성작을 내놨습니다. 그리고 1944년 5월부터 작전에 투입됐죠. 미 육군은 B-29 시제 3대가 제작돼 첫 비행을 하기도 전에 보잉과 납품 계약을 맺었습니다. 선주문량이 무려 1664대였죠. 모두 3970대가 제작된 B-29의 평균 가격은 약 64만달러로, 모두 합치면 약 10억달러 이상을 지급한 겁니다.

B-29 개발과 구매, 운용에 투입된 예산은 30억달러 이상으로 전체 사업비 규모가 20억달러 정도였던 맨해튼 프로젝트보다 많았습니다.

핵폭탄을 만드는 것보다 운송수단을 만드는 데 더 많은 돈을 들인거죠. B-29 폭격기에는 조종사를 포함해 모두 11명의 승무원이 탑승합니다.

길이 30.18m, 폭 43.06m, 높이 8.5m로 최대이륙중량이 60t을 넘습니다.

2200마력짜리 엔진 4기를 장착해 작전반경은 5230㎞, 최대 9000㎞까지 비행할 수 있습니다.

무장은 원격 제어 포탑에 12.7㎜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10정, 꼬리 포탑에도 같은 중기관총 2정을 장착했습니다.

B-29에는 당대 최고의 혁신적인 기술이 적용됐습니다. 기체에 여압장치가 설치된 첫 항공기가 바로 B-29입니다. 때문에 승무원들은 일상복을 입고 편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죠. 이전까지 높은 고도의 압력을 견디기 위해 전용 헬멧과 방한복을 입어야했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혁신이었습니다.

보잉은 이 때 습득한 여압장치 기술을 전후 민간 여객기에도 도입했죠.

두 번째 혁신적인 기술은 원격 제어 포탑입니다. 전기식 계산기, 즉 기계식 컴퓨터의 초기 모델쯤으로 불릴만한 원격 조준 시스템이 적기와의 거리와 속도, 외부 기온 등 외부 데이터는 물론 기관총탄의 중력까지 계산에 적 전투기에 기관포탄을 퍼부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승무원은 호위기가 없어도 자신감을 갖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죠.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전선에 투입됐던 B-17 폭격기가 독일 전투기들의 집중 견제를 받아 많이 격추됐던 반면 태평양전쟁에서 활약했던 B-29는 이런 첨단 기술 덕분에 별다른 저항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초반에는 인도를 후방기지로 삼고 중국을 전진기지로 해 일본을 공격하려 했지만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수개월간 12대의 B-29가 손실되기도 했죠.

1944년 괌과 사이판 티니안 등 북마리아나 제도의 주요 섬들을 점령한 뒤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1945년 초까지 각 섬에 비행장을 건설했고 이 곳에서 보다 원활하게 재보급을 받아가며 폭격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죠.

하지만 폭격 임무 초기에는 제트기류로 인해 성공률이 낮아서 일본 국민이 공습경보가 울리면 집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경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끔찍한 상황은 1945년 3월 10일 벌어집니다. 이른바 도쿄 대공습에서 345대의 B-29가 소이탄을 투하한 겁니다. 종류에 따라 2000~3000도의 고열을 내는 소이탄은 건물 대부분이 목재로 이뤄진 도쿄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일본 정부 조사에 따르면 도쿄 대공습으로 8만3000여명이 사망했고 4만1000여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도쿄에 소이탄을 투하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조종사와 승무원에게 커티스 르메이 사령관은 ‘민간인도 어떤 형태로든 전쟁에 기여한다. 일본에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도쿄 대공습 이후 B-29 폭격기 편대는 일본 주요 도시는 물론 진해와 부산, 청진, 원산 등 우리나라 앞바다에 무수히 많은 기뢰를 투하했습니다. 주변 식민지로부터 식량과 군수물자가 본토로 반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섭니다.

이러던 중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고 5월 7일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뒤 9일 항복이 정식 조인되면서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미국은 극렬하게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8월 1일까지 항복할 것을 권유했지만 일본의 지도부는 자국민이 이렇게 끔찍하게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월 6일 우라늄형 핵폭탄 리틀보이가 히로시마에 , 9일에는 플루토늄형 핵폭탄 팻맨이 나가사키에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B-29폭격기는 핵폭탄을 투하한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 폭격기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영원히 이대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오상현 기자

legend1998@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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