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의 Next Paradigm <3>] 해외 직구 금지 논란과 엘리트 관료의 역할
2024년 대한민국이 단군 이래 한반도에 자리 잡은 한민족의 최고점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모든 것이 소실된 척박한 땅에서 어려운 세월을 악착같이 살아낸 우리는 이제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모자람이 없는 선진국이 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지난 수십 년간의 성공이 지속되지 않을 것 같다는 인식 역시 보편적인 듯하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저출산 상황에서 성장의 동력은 꺼져가고 있으며, 패스트 팔로(fast follower·빠른 추격자) 전략은 수명을 다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엘리트 관료, 경쟁력 확보에 결정적 역할
과거 우리의 성공 공식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술이 있었다. 의대 광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이전까지 우리 사회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기꺼이 이공계 학과를 선택했다. 젊었던 그들이 중장년이 될 때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쌓아온 최첨단 기술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력은 세계 10위권으로 평가되는데, 이는 우리 경제 규모에 걸맞은 수준이다. 특히 반도체를 포함한 전자 기술, 자동차 기술, 정보기술(IT)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단적인 예로 라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납득할 수 없는, 강탈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의 요구는 일본 산업계가 네이버의 기술을 욕심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다.
우리 경쟁 상대가 일찍이 근대화를 이룩하고 식민지를 보유했던 제국주의의 후예임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은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뤘다. 북미, 유럽, 일본에는 역사가 100년이 훌쩍 넘는 기술 기업이 수두룩한 데 반해,우리나라 공업 기업은 1970년대에 대부분 설립됐다.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공학 기술 개발 역시 그즈음에야 시작됐다. 기초과학에 대한 자체적인 연구는 1990년대 들어 시작됐고, 이공계에 필수적인 대학원 인력 양성도 1971년 카이스트(KAIST)가 설립되며 비로소 본격화했다. 서구 선진국과 일본이 100년 넘게 걸려 달성한 과학기술력을 우리는 불과 5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내에 따라잡았고, 일부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랐다.
엘리트 관료의 결정적 역할이 성공의 이면에 있었다. 1970년대, 과학입국(科學立國)이라는 지도자의 비전을 받들어 정부의 엘리트 관료는 국가 기술력 강화를 위한 장기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일부 부침이 있었을지언정 뚝심 있게 계획을 밀어붙였다. 일반인에게 해외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던 당시, 상대적으로 많은 정보가 있었던 관료 집단은 이를 바탕으로 집중적인 투자 대상이 될 분야를 세심하게 선택하고 과감하게 투자해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갔다. 해외 유치 과학자 사업, 차관을 통한 연구 기자재 도입, 두뇌 한국(BK·Brain Korea) 사업, IBS(기초과학연구원) 사업 등으로 이어지는 굵직한 흐름은 엘리트 관료의 선견지명과 뚝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극히 단순화하자면,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외화를 획득하는 것은 지난 50여 년간 우리 경제의 패러다임이었고, 과학기술이 산업화의 동력이었다. 엘리트 관료는 이런 패러다임하에서 고유의 역량으로 먼저 큰 그림을 그리고 정권에 상관없이 마스터 플랜을 지치지 않고 실행해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공을 끌어냈다.
경쟁 환경 변화, 관료 역할도 달라져야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건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우선 우리의 경쟁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저렴한 고급 인력을 바탕으로 우수한 상품을 싸게 만들어 파는 경쟁력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중국과 일부 동남아 국가에 넘어갔다. 반도체를 포함해 세계적으로 초격차를 유지했던 분야의 경쟁력도 흔들리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반도체 시장의 헤게모니가 짧은 시간에 급변했다. 한 수 아래로 봤던 미국이나 대만에 세계 최고의 위치를 당장 빼앗겨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속에 국가 간 기술 장벽은 더욱 촘촘해지고 있으며, 전 세계를 공급망 전초기지로 삼았던 우리 기업의 설 자리는 점차 좁아지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전히 우리의 미래는 국가 기술력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그와 동시에 이미 선진국이 돼 세계적인 도전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기술 패러다임은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 역시 명약관화하다. 이제까지 엘리트 관료는 쇼를 진행하고 만들어가는 ‘주인공’이자 ‘진행자’였다. 엘리트 공무원이 우리 산업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선견지명을 바탕으로 집중 육성할 산업을 미리 정의하고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이 과거 우리의 성공 방정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국가 기술 전략은 이제 생명력을 다했다. 전공자나 혁신가조차도 자기 전문 분야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구체적인 사항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술 담론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엘리트 공무원이 더 이상 쇼를 진행하고 만들어가는 ‘진행자’가 아닌,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고 선의의 피해자 발생을 방지하는 ‘심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미국과 중국이 기술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때, 우리가 지속적인 성장을 이뤄내기 위해선 창의력을 바탕으로 기존에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창의력은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기꺼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성장하는 법이다.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제약 없이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 즉, 창의력의 가장 중요한 자양분은 공정한 경쟁과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있었던 해외 직구(직접 구매) 금지와 관련한 논란이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점이 있다.
해외 직구 금지, 정책 예측 가능성 놓쳐
국민 건강과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알테무(알리익스프레스+테무)’로 대변되는 중국 유통 업체의 국내 시장 진출을 관리하겠다는 정책의 취지를 납득하지 못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코로나19 이후 얼어붙은 부동산 경기를 제조업을 통해 살려보겠다는 정책을 도입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과잉생산을 불러왔고, 과잉생산품을 초저가 물량 공세를 바탕으로 해외시장에 판매해 해소해 보자는 것이 중국 정부의 판단이다. 그 여파로 내수 시장에서 격변에 가까운 충격을 받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도 중국의 저가 수출에 족쇄를 채우는 정책을 적극 도입하는 실정이다. 또한 중국의 싸구려 제품으로 국민 건강이 위협받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직구 금지 정책이 격렬한 사회적 반발을 불러온 것은 정부의 고위 관료가 심판 역할을 넘어서 지극히 관료주의적이고 행정 편의적인 방식으로 그 어떤 정책적 예측 가능성도 없이 국민 선택권을 제약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는 작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때의 논란과도 궤를 같이한다. 국가적인 재정 긴축 국면에서 R&D 예산이라고 무조건 늘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국민의 혈세를 허투루 쓰는 카르텔이 있다면 이 역시 타파해야 함이 옳다. 하지만 작년의 R&D 예산 삭감은 일방적이었고, 예측 불가능했으며, 급작스러웠다. 결과적으로 많은 젊은 과학기술 인력이 눈물을 머금고 새로운 직업을 알아보고 있는 것이 과학기술계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실패를 기꺼이 감내하며 세계 최초의 연구를 할 인재가 과학기술계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엘리트 관료의 장기적인 비전 설정과 세심한 정책 실행이 여러모로 아쉬운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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